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따라다닙니다.
31st AUG. 2021
반 아이들이 금요일에 `동사형 꿈 진로 캠프`를 온라인으로 참석한다. 실시간 종례 모니터 너머로, 벌써 재미없어하는 친구들의 표정이 보인다. 18살의 가을부터 누군가가 나에게 꿈을 물어볼 때마다 ‘수학 교사(師) 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고작 `사(師, 事) 자 들어가는 직업 이름’ 한 글자로만 대답하는 생각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삶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던 고2 가을, 책 한 권(김혜진(2005). 『프루스트 클럽』. 바람의 아이들.)을 읽고 나서부터 ‘사진을 찍는다.’ 혹은 ‘카페를 지킨다.’와 같이 나를 소개하는 표현을 고민했다. 그렇게 나는 18살부터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어른’이라는 동사형 꿈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따라다니는 중입니다.’라고 소개한다. 이후 20대 때 조금 더 내 삶의 방향성을 정리하여, 나에게 3가지의 표현이 남았다. 1. 정직하고 투명하게 의사소통한다. 2. 어제보다 오늘 더 배운다. 3. (배운 대로) 먼저 행동하고, 그리고 가르친다.
이렇게 결정하고나니 이제는 어떤 곳(직장)에 내가 있어야 하는지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그저 청소년들과 함께하기만 하면 충분했다. 쉼터, 그룹 홈, 청소년센터, 위클래스, 청소년 문화의 집. 학교가 아닌 곳으로만 열심히 찾아보았다. 내가 학생일 때 이미 인구 절벽은 충분히 예견되었고, 이 시대 상황 속에서 나는 선생님이 될 자신이 없었다. 학교가 아닌 곳으로만 18살 가을부터 27살 봄까지 8년 반을 찾고 고민하였지만 결국 선택한 곳은 기독교 사립학교였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 쉼터, 센터와 같은 장소들은 청소년들이 ‘찾아서’ 온다. 즉, 의지나 간절함이 있는 아이들이 찾아온다. 그렇지 않은, 방치된 아이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들은 나보다 더 사랑 넘치고 엄청난 능력을 갖춘 선생님들이 그들을 보살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복도와 계단을 걸어갈 의지만 있다면, 일과시간에 잡무를 끝내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야근을 기꺼이 감당할 마음만 있다면 마음껏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다. 수업이 마치면 교무실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교실에 남아 학생들과 계속 함께한다. 쉬는 시간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교실에 간다. 찾아가는 이유는 딱히 없다. 종례 때 주어도 될 질병 결석계를 굳이 쉬는 시간에 가져다준다. 방송으로 ‘3반 수학 부장 오세요.’ 해도 되지만, 굳이 방학 숙제 문제집 30권을 들고 3반 교실로 간다. 그냥….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다. 아내는 "선생님이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오는 거 애들 싫어해." "수학 선생님 좋아하는 학생 거의 없는 거 알지? 특히 여학교.”라는 팩트로 내 명치를 매우 세게 때리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싶다. 그러려고 여기 왔으니. 수학 이야기를 합법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10분이다.
- 정직하고 투명하게 의사소통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가치관을 투명하게 오픈해야만 한다. 가치관에 성경적 세계관이 있는 나에게, 공립학교에서 나의 가치관('천국 가서 잘 살 텐데 여기서 까지 남의 것 빼앗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해? 나는 그러지 않을래.')을 소개할 수가 없다. 두 번째 이유까지만 해도 공교육이면 충분하였다. 그런데 세 번째 이유가 생겨나니, 기독교 사립학교가 아닌 곳에서는 살아낼 수 없는 삶이었다.
그런 나에게 강당에 남아 이것저것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방송부와 학생회 친구들이 어찌나 예쁘고 귀여운지. `시행착오 또한 배움이고 경험이겠지.` 생각하며 그저 곁에 앉아서 그들의 좌충우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행정실에서 교무실에서 나를 계속 찾을 때도 "강당에서 학생들 봐주고 있었어요. 죄송해요….”라고 이야기하면 모두 이해해주시는 이 공동체는 어찌나 따뜻한지.
방과 후에 모여 독서토론하고, 수학 공부방을 열어두면 찾아와 또다시 공부하는 친구들의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거리두기 4단계로 아이들을 일찍 집에 보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일찍 가지 말고 16시까지 같이 있으면 좋겠다….` 속삭이는 나를 본다. 그렇게 16시를 넘겨 교무실로 돌아가, 그제야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다른 선생님들께 밀린 업무를 허겁지겁 완성해 드리더라도, 교실에 있다 오는 것만으로 `수고하셨다` 말씀해주는 이 공동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사족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룰 때 만들어내는 단단함은 많은 어려움을 수월하게 통과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제부터, 이 공동체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초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내게 많은 무력감을 준다. 정규 교육과정에 없는(사실 ‘할 필요 없는’, ‘안 해도 되는’) 2박 3일 사제동행 캠프를 준비할 때, ‘이거 왜 해요? 나 안 할래요.’라고 후임 선생님들이 이야기하신다면, 너무 속상할 것 같다. 무엇보다 더 속상하고 또 원망이 되는 점은 이것이다. 29년 동안 삶으로 고민하고 내린 내 삶의 방향성과 그렇게 나를 초청한 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무시하듯 여겨진다는 것이다.
사족 2
지난주부터 원어민 선생님이 오셨다. 감사하게도 같은 가치관을 지닌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들께서 저녁 7시까지 이사를 돕고, 사비로 가재도구를 사드리고, 학교 예산으로 가전제품을 사서 넣어주셨다. 오늘은 보일러를 함께 고쳤다. 원어민 선생님을 힘껏 돕고, 정작 본인의 일은 19시까지 하다 퇴근하셨다. 그 선생님의 일을 또 부서 선생님들이 나누어서 맡아하신다. 다른 공립중학교로 배정받은 원어민 선생님은 집 계약까지만 학교에서 함께하고선,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학교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다. 우리 학교가 그런 학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