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라틴어 수업.
영종도로 중등 수학과 1급 정교사 연수를 들으러 가는 시간을 들여 책을 읽었다. 교수님의 『라틴어 수업』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서,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책 『라틴어 수업』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Do ut Des.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두 표현이 있었다. 나 먼저, 그리고 너. 가 아니라 너 먼저, 그리고 나. 의 인식이 있는 서양의 문화권을 배울 수 있었다.
저자 한동일 교수님은 천주교 사제(司祭)였고, 바티칸 대법원(Rota Romana. 로타 로마나) 변호사이다. 즉, 사제셨던 천주교도의 책이다. 많은 개신교도들이 천주교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각은 조금 다르다. '천주교 교리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지만, 마지막 시대에 누가 천국에 있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는 것이 내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나는 책을 읽었음을 미리 밝힌다.
공감능력이 아주 많이 떨어지는 나에게 '와 참 공감된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게 들었던 생각 또는 마음의 내용이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이 들었을 때, 나는 참 공감받음을 느낀다. 이런 상황이 자주 생기지 않는다. 나의 가치관과 생각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기에 내 생각과 꼭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더욱 책을 찾게 되는 것도 같다. 다양한 생각들을 읽으며 그 안에서 내 생각과 마음이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특히나 에세이를 자주 읽는 것 같다.)
그렇게, 이 책에서도 비슷한 마음들을 느낀 곳이 두 곳 있었다.
생각의 어른을 찾다.
Quaerere sententiae adultos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삶에서 보고 배울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이런 바람 역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6쪽. 한동일. (2021). 『믿는 인간에 대하여』. 흐름출판.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 또한 tvN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며, '저런 아저씨가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책에서는 '저런 아저씨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른'이라는 말에 대한 현실적인 인상이라면,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라는 탄식에서는 이 단어에 대한 또 다른 기대를 읽게 됩니다. 나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누군가를, 이 혼란한 삶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생각의 어른'을 바란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27쪽. 같은 책.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바라는 생각의 어른은 많이 공부하고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공부하거나 소유한 것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진심으로 누군가의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다 자랐거나 나이가 든 사람, 지위나 항렬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생각의 어른일 겁니다.
28쪽. 같은 책.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그러한 어른은 '생각의 어른'이다.
그랬구나. 우리 사회도 나처럼 그러한 '어른'을 찾고 있기는 했구나. 그런데 '나의 아저씨'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할 수는 없을까?
한동일 교수님은 이어서 바로 교훈을 전해주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27쪽. 같은 책.
나의 이웃, 생각의 어른을 밖에서 찾고 바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이웃이, 어른이 되어줄 수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30쪽. 같은 책
'배우고 싶은 어른이 세상에 한 명도 없구나.'라는 교만하고 철없던 18살의 나는 내가 그러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살의 나는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야지.'라는 패기 넘치는 결심을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각의 어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교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신다.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그저 살아남는 것조차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참담한 소식은 주변 모든 선생님들의 연대와 애도를 만들었다.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여, 지금 이 순간, S 초등학교 선생님을 애도합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애쓰고 힘써야 할 선생님들이 살아남기 위해 힘쓰는 시대가 되었다. 교직만 그럴 것 같지 않다. 학생들의 삶이라고 다르지 않고, 학부모님들의 삶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는 '생각의 어른'이 되기를 힘쓰기 전에, 살아남기를 힘써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열심히 '생각의 어른'을 찾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으니, 조금 더 애써보고 싶다. 조금 더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삶을 애써보고 싶다. 이를 위해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자야 할 테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적게 쉬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더 많이 나누고, 더 적게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해내보기로 다짐하자.
한나 알안 주교님은 동방 마로니타 교회 부총대주교이자 대법관이며 레바논 사람입니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이 몸에 배어 계시고, 학문적으로는 제가 감히 올려다볼 엄두도 못 낼 분이지만, 공부하고자 하는 제자에겐 한없이 자애롭고 자상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신분이라면 충분히 누군가의 보좌를 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었는데 알안 주교님은 당신의 고국에 가실 때도 늘 손수 여행가방 하나만 들고 혼자 기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셨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기숙사 원장을 겸임하면서 기숙사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학생을 굳이 면담까지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 작은 일도 기꺼이 하셨구나 생각합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작은 일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남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하시는 그분다운 행동이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닫습니다. 태도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려면 먼저 자기 인식을 바꿔야 하는데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권위를 내려놓는다'라는 말이 수사나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몸이 함께 내려와야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 순간 역설적으로 '진정한 권위'가 세워집니다.
259쪽. 같은 책.
생각의 어른이 되는 다양한 방법 중 한 가지로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 있겠다.
자기 권위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교사로서의 권위를 자주 생각한다. 교사로서의 권위를 내려놓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한나 주교님처럼 '작은 일도 시키지 않는 것'과 같은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자주 생각해 보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가 곁에서 내게 말해주면 좋겠다. "선생님. 이것은 선생님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직접 하신다면 그 권위를 내려놓으실 수도 있으실 거예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당장 떠오르는 일은 고작 이 정도뿐이다. 수행 평가와 지필 평가 성적 확인을 교과부장에게 일임하지 않고, 직접 한다.
낮은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어려운 나는 여전히, 권위적인 사람인 듯하다.
사족.
한 학생의 편지의 부분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아직 '생각의 어른'의 차원까지 다다르려면 무척이나 멀었겠지만, 애쓰고 있는 방향성이 맞는 것 같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존재의 태도에서 온다.
Paradisus et infernus : in hominis animo differentia est.
(이 주제에서는 '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여기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다루겠다. 천국도, 지옥도 임하는 곳으로 주제를 한정하면 좋겠다.)
사제동행 캠프 둘째 날 밤 아니 셋째 날 새벽, 믿지 않는 친구 다섯 명과 예수님을 믿는 친구 2명이 모여 토의하는 곳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갔다. 예수님을 모르는 친구들의 다양한 질문 중, 특별히 속으로 많이 기도하며 대답했던 한 가지가 있다.
"선생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가잖아요. 동시에,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지으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만들어서, 사랑하셔서 만드셨다는 사람들이 가야만 하는 지옥을 가게 하시나요?"
사제(司祭) 셨던 한동일 교수님의 대답이 천국과 지옥을 바라보는 천주교의 교리인지 나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보다는 기독교적 권위가 더 높을 것이고, 이 이야기가 마음의 공감을 건네준다. (개신교 교리에서는 '연옥' 개념이 없지만, 그대로 옮겨왔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천국과 연옥, 지옥의 모습은 단테가 생각했던 것처럼 복잡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습니다. 천국은 마냥 좋고 지옥이라고 무조건 나쁘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도리어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이 모두 같으리라고 생각해요. 지옥에서도 천국과 같은 음식과 옷이 제공되고, 환경도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다만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천국이나 지옥에서 사용하는 숟가락은 모두 길이가 아주 길어서 밥을 떠먹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봅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지옥에서는 그 긴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자기 입에만 넣으려고 하고, 천국에서는 같은 숟가락으로 자기 앞에 있는 상대에게 음식을 떠 넣어준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지옥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천국에서는 서로 배불리 먹을 수 있겠지요. 저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 중 이 이야기가 가장 현실적으로 와닿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단 하나의 차이는 태도의 차이일지 모릅니다.
252쪽. 같은 책.
사제동행 캠프 마지막 날 새벽, 내가 다섯 명의 학생들에게 제시했던 이야기도 비슷하다.
"나에게 오늘 밤 찬양의 시간과 기도의 시간은 참 따뜻하고, 감사하고, 행복했어. LED 캔들을 켠 채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보이는 라디오를 진행하던 시간은 참 따뜻했어. 그 시간들이 무한히 이어지는 곳이 천국일 것 같아. 예배 때 들었던 것처럼 우리는 죄가 가득하고 언제나 미움과 질투가 넘쳐나. 하지만 천국은 그런 게 없으니 사랑만 가득할 테지. 그에 비해 지옥은 우리 죄의 결과들로 가득한 곳이지. 친구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는 곳에서 어는 누구도 믿지 못한 채 서로를 향한 공격만 가득한 곳일 것 같아. 엄청 싫어하는 친구랑 고작 1시간만 함께한다고 해도 정말 끔찍할 텐데. 미움이 가득한 사람들과 영원한 시간을 함께한다면, 그게 가장 끔찍한 일이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서의 지옥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확실한 한 가지로 지옥에는 예수님의 희생도, 이를 믿는 믿음도, 죄의 사함도, 결국에는 어떠한 사랑도 없다는 점만큼은 같겠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요한 계시록에서의 불지옥으로 인해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들 또한 지옥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으로 인해 또 다른 실족함을 갖지 않으면 좋겠다.)
교수님은 결국 '태도'가 천국과 지옥을 가를 것으로 말씀하신다. 앞선 주제에 다루는 것처럼, 결국 대한민국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나라가 되었다.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 이곳이 결국 지옥과도 같은 곳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곳이 천국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으로 교수님도, 그리고 나도 '사랑'을 말한다. 돌봄과 환대가 개인에서 공동체로, 한 나라로 퍼지다 보면 언젠가는 이곳, 우리나라도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에도 기억하고, 배우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은,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는 많은 돈이 아니라 실패의 시간을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태도와 정서일 것입니다. 실패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힘도 포함입니다. 그것을 해낸 사람은 자기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강해질 수 있음을, 멈춰 섰을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65쪽. 같은 책.
합법적인 관계 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편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이들처럼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한 이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두려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84쪽. 같은 책.
궁극적으로 이 책(토마스 아 켐피스. Thomas a Kempis.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은 불안이라는 주제를 성찰하고 있는데, "인간이 무언가를 무질서하게 얻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즉시 그로 인해 불안해진다Quandocumque homo inordinate aliquid appetit, statim in se inquietus fit"라고 합니다.
185쪽. 같은 책.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 재인용.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도 잘만 사는 누군가를 기사로 마주할 때,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심신 미약의 이유로 가벼운 처벌을 받는 범죄자를 지켜봐야 할 때, 우리는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어'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오래전 사람들이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믿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천국이 있다면, 지옥이 있다면 하는 가정과 함께 그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위로와 위안을 받기도 할 겁니다.
만일 죽음 이후의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무력감만 느끼다가 허무하게 죽을지 모른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지금 현실은 이렇지만 내가 신을 믿고 바르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악하게 사는 사람은 지금은 저렇게 호의호식해도 훗날 하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 것이다'라는 등의 생각은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현실을 바꿀 수 없는 힘없는 인간에게 천국과 지옥이라는 인과응보의 공간은 곧 위로와 희망의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249~251쪽.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