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욱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한 마디 : 미안해요.
중등 수학과 1급 정교사 자격 연수에서 김상욱 교수님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다. 인천 1정 연수 중, 국어, 영어, 수학 선생님이 함께 강연을 듣는 시간이었다.
15분 정도 책의 배경과 집필 이유 등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듣고, 이후 문학 평론가 허희 님과 함께 북토크 형식으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김상욱 교수님께서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셨다. 모든 질문과 답변의 내용을 담기 어려워,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의 조각을 모아보았다.
-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한 가지 이야기.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하셨다. 7~80년대 학력고사 시절보다 더욱 끔찍해진 대입 환경을 보며 속상하고, 또 미안해하셨다.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어른들이었고, 어른들의 가치관이 결국 우리나라 입시의 현실을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대한민국 입시의 상황은 '죄수의 딜레마'와 꼭 맞아떨어진다. 모두 함께 이 시스템을 멈추면 되지만, "바꾸자! 바꾸자!" 모두가 이야기를 해보았자 '나 혼자만 멈추어버리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뿐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계속 같은 경쟁의 시스템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더 잘 할 수 있어."라는 말조차 해줄 수가 없다. 더 잘하라는 의미는 곧, 옆의 친구를 더 짓밟으라는 의미를 내포할 뿐이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래의 당부를 덧붙이셨다.
세상의 평가라는 잣대에 상처 받지 말아 주기를.
- 죽음보다 삶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려고 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교수님은 책상, 의자, 수소 기체, 지구의 지각. 이러한 것들이 모두 죽어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이 나는 불편했다. 죽음은 삶의 대립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이 원인이 되고, 죽음이 결과가 되는 인과관계일 수는 있겠으나, 반의 관계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책상, 의자, 수소 기체, 지각과 같은 것들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지 않은 것(무생물)'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지 않을까?
강연 중 허희 평론가님이 이 질문을 먼저 하였는데, 교수님은 "삶이 먼저, 그리고 죽음은 그 결과."라는 명제가 내포하는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살아있는 것'이 일반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살아있지 않은 것'이라고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분류는 지극히 지구상의 인간 위주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온 우주에는 생물보다 무생물이 많다. 수소가 온 우주의 74%를 차지하고, 헬륨이 24%를 차지한다. 남은 2% 중에 산소, 탄소, 질소, 철 등등의 원소가 나누어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탄소와 산소가 모여 식물을 이루고, 질소가 더해져 동물을 이룬다. 온 우주의 물질을 생물과 무생물로 나눈다면 99.999999999%의 무생물과, 0.000000001%의 생물로 이루어져 있겠다.(10^-1은 예시이다. 실제로는 더 작은 비율일 것이다.) 마치 이것과 같다. 지구상의 생명체를 분류할 때, 코뿔소 VS 비 코뿔소로 분류한다면, 이것은 합리적인 분류일까?
- 과학의 지식을 추구하지 말고, 과학 하는 태도를 기를 것.
과학을 통해 얻게 되는 지식들을 쫓아가지 말고, 과학하는 태도를 길렀으면 좋겠다. 지식과 태도? 이렇게만 들으면 난해하다. 교수님께서는 실제로 입증된 증거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볼 것을 요청하셨다. 과학하는 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누어주시지는 않았지만, 책 『울림과 떨림』에 상세하게 서술해 주신 세 가지 태도를 이곳에 남긴다.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리는 태도다. 증거가 없으면 결론을 보류하고 모른다고 해야 한다. 증거 없이 논리로만 이루어진 이론이나 주장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증거가 없는 것까지 모두 이론에서 설명하려고 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종교나 철학은 자신의 이론으로 때론 지나치게 많은 것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과학자가 보기에 그냥 모른다고 했으면 좋을 부분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과학은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다. 충분한 물질적 증거가 없을 때, 불확실한 전망을 하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기초가 되길 기원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268쪽~270쪽. 김상욱. (2018). 『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 대학교 공부는 4년간 세상을 바라보는 한 가지의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
세상을 인식하고, 또 상호작용하며 살아가기에 중등 교육과정(중학교 3년 + 고등학교 3년)의 내용은 충분하지 않다. 학부 교육과정(대학교 4년)에서 하나의 전공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적인 틀 한 가지를 익히자. 물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고 나면 그 한 가지 틀만으로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 세상에!)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4년 동안 일관적인 틀을 만드는 훈련을 했으니, 그때 배웠던 것처럼 이제는 만들었던 틀을 조금씩 수정해 가면 된다. 그렇게 천천히,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일관적인 틀을 최소한 한 가지 영역에서만이라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꼭 순수과학이 아니어도 괜찮다. 공학계열이어도, 인문학 전공이어도, 사회과학 전공이어도 괜찮다. (4년간 만들어둔 틀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평생을 살아가지만 않는다면 좋겠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4년의 시간을 공부로 채워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유익하겠다.
(세상을 바라보는, 수정이 필요한 세계관 하나를 만들기 위해 4년의 시간과 재정을 투입할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나는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만드는 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바로 사회에 참여하여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로지 세계관을 위해 4년의 긴 시간과 비싼 학비가 필요할까.)
- 융합은 사전에 자신만의 틀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시작할 수 있다.
자신만의 틀은 4년간의 학부 과정 공부를 통해 만들어가게 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 채 시작하는 융합은 각 영역의 병렬적 나열이 될 수밖에 없다. 교수님들도 융합 프로젝트를 구성하게 되면, 프로젝트 첫날 함께 보여 각 영역이 연구할 과제를 나누고, 프로젝트 마지막 날 각자의 연구를 가져와서 합치곤 한다. (2023학년도 학교 자율적 교육과정을 진행하는 1학기 말의 시간들이 무척 많이 떠올랐다. 참 많은 공감이 되었다.)
그렇기에 우선은 깊이 있는 학습을 통해 유의미한 학업 성취를 먼저 이룬 이후에 무언가를 시작하면 좋겠다. 학문에서의 융합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한 한 가지 비유를 교수님은 이렇게 들어주셨다.
1. 한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 타 문화권의 국가에 방문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과 배움들.
2. 타 문화권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한 한국인 여행객을 바라보면서 얻게 되는 신선함과 새로움들.
이 두 가지가 융합교과가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되겠다.
- 물리 제국주의
많은 순수과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갖는 견해 중 하나로, 자기가 전공하는 학문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을 이렇게 부르셨다. (곁에 있던 수학 선생님 한 분과 참 공감이 갔다. 많은 수학 선생님들에게도 수학 제국주의가 만연해 있다.) 수학에서도 수리철학사의 근간이 '수학기초론'이었기에 믿음이 어떠한 의미와 방향성을 갖는지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합리주의 사회에서 학문의 진전이 수학적 사고와 과학적 탐구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각각의 학문 한 가지가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갖고 계시다.
- MBTI에 대하여.
혈액형에서부터 MBTI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들을 범주화하여 인식하는 것들을 좋아한다. 또한 그렇게 범주화하는 것에 무척 큰 반감을 갖는다. 출신 대학, 직업, 성별, 혹은 배경 등. ('저 사람은 여성이니까 000000 일 것이다.' 혹은 '저 사람은 000 대학교를 졸업했으니 0000일 것이다.'와 같이 사람들을 특정한 요인으로 범주화하는 것들을 좋아하며, 동시에 큰 반감을 갖는다.) MBTI라는 검사가 심리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한계가 분명한 검사임을 꼭 기억하면 좋겠다.
- 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다 재미있게 읽기 위해 바라보면 좋을 관점.
시간의 흐름(혹은 역사적인 관점)에 따라 변하게 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논하는 대신, 물리학자의 관점으로 이 책에 반영된 내용과 책에서 배제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면서 읽어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책은 실제로 원자, 지구, 별과 우주, 생명체, 인간, 인간사회(그리고 정보), 문화의 순서로 세상에 대한 물질들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사이사이 세 번의 에세이로 허구의 상상으로 표현한 신, 살아있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의 죽음, 다른 생명체와는 구분되는 가장 큰 인간의 문화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사랑에 대한 글을 남겨주셨다.
- 과학은 오로지 사실(Fact)만 다룬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