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으로 루저의 길로 접어든 이들의 마음에 깃든 '자유'
김기석. (2019). 『김기석 목사의 청년편지』. 성서유니온선교회.
23년 여름, 기윤실 교사모임 수련회장에서 처음 알게 된 책이고, 교사모임에서 책을 받아 읽었다. 김기석 목사님은 2020년 겨울 기윤실 교사모임에서 강사 목사님으로 처음 뵈었다. 유튜브에서 '잘 믿고 잘 사는 법'으로도 몇 번 뵈었다. 이 책은 QT집 '매일 성경 순'에 매달 연재했던 칼럼을 묶어 출판되었다.
20년 겨울 받았던 통찰들을 이곳에서 책을 읽으며 다시 느꼈다. 나이가 지긋이 드신 목사님께서 청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단호하고도 따뜻한 어투로 담겨있다. 책에서도 염려가 가득 담겼다. 불평등이 당연시되고, 경쟁이 내재화된 세상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청년들에게 또다른 부담을 지우는 일이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가득하셨다. 그러나 그래서 내게는 더욱 위로가 되었다.
스무 살부터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에게 흘러넘치는 복을 이미 예비하셨던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 하나님. 그런데 이미 예비하신 복을 내가 아니라 내가 만나게 될 청소년들에게 대신 넘겨주세요. 나는 이미 넘치게 받았으니, 이제는 그 복을 청소년들에게 대신 넘겨주세요."
그래서인지 나의 20대의 대부분에서는 축복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몸 담고 있던 교회 공동체는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내가 속했던 기독교 동아리에서는 나 이후로 어떠한 학생도 모집되지 않았다. (결국, 동아리는 없어졌다.) 그럼에도 이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직업 군인일 때에도, 전역 후 다시 학교에 들어서면서도, 결혼하여 나의 가정이 생겼을 때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에는 늘 복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김기석 목사님의 의도는 내 삶과는 방향성이 다르다. '당신의 축복을 내려놓았을 때 더 넘치는 축복이 임할 것이에요.'가 아니다.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아지는 자유를 선택할 것, 이를 통해 더욱 우리의 존재는 위협받겠지만, 그럼에도 낮아지는 자유를 선택해볼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좋은 대학, 좋은 일자리를 통해 따뜻한 잠자리, 맛있는 식사,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소박한 꿈이다. 작고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삶의 전부를 걸고 경쟁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배의 시간에만, 찬양의 시간에만 '낮은 곳에 있기를 원해요.' 고백하지 않고 싶다.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다. 그런데 이같은 삶을 함께 살아내자고 요청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에, 더 요청하기가 어렵다. 누군가가 먼저 찾아오면 좋겠다. "함께 해요, 그 가치관의 삶."
저자는 책의 처음 부분에 박노해 시인의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경쟁력도 없고 힘도 없이 무엇으로 사회를 바꿉니까?" 라고 젊은이들이 물을 때, 시의 화자는 대답할 수가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내 삶의 태도가 시의 화자와 닮아있다.
23년 여름 방학 직후, 서이초등학교로부터 시작된 선생님들의 이슈는 마침내 법안 개정을 이루어내었다. 여전히 반쪽짜리의 법안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현재까지 열 번의 집회 동안, 거의 모든 선생님들께서는 여의도로, 국회 앞으로 나가셨다. 여름 방학 이후, 관련된 무수한 글을 쓰고, 또 지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정돈되지 않았다. 나는 사회와 시스템에 무지했고, 또 무감했다. (나는 사회의 변화보다 개인의 변화에 더 마음이 쓰이는 사람인가보다.) 지금도 여전히, 선생님들의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쓰기 어렵다.
정의(공의)와 이익, 영혼과 성공 중에서 나는 정의(공의), 그리고 영혼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정의(공의)와 영혼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되어야만 한다면, 마땅히 소외받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자발적으로 루저의 길로 접어든 이들의 가슴에는 자유가 깃들게 마련입니다.'(같은 책, 39쪽) 요한복음 8장 31절에 언급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의 "자유"가 이것이지 않을까.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어 루저가 된 이들의 가슴에는 회한이 남지만 자발적으로 루저의 길로 접어든 이들의 가슴에는 자유가 깃들게 마련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그런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경쟁과 욕망으로 빚어진 철옹성 같은 자본의 벽에 그는 작은 틈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현하는 이들이야말로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에게 붙여졌던 별명에 합당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
같은 책, 38~39쪽.
아래는 박노해 시의 원문을 실으며, 글을 마친다.
갈라진 심장
생각 있다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좋은 일도 하고 성공도 하겠다며
대단한 젊은이들 앞에서
나는 그저 미소 지으며 경청할 뿐
말없는 내 모습에 조금씩 불안해하던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둘로 갈라진다
공격적 질문자와 심하게 침묵하는 자로
왜 성공과 좋은 일을 동시에 추구하면 안 됩니까
내 가슴 뛰는 삶을 살겠다는데 왜 문젭니까
요즘 어떻게 선하고 의롭기만 한 게 가능합니까
경쟁력도 없고 힘도 없이 무엇으로 사회를 바꿉니까
나의 침묵을 항변하는 다수의 젊은이들에게
나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가만히 울먹이는 소수의 젊은이들
나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한다
씨알은 처음부터 두 쪽이 아니라고
인간의 심장은 두 개가 아니라고
처음부터 갈라진 씨알은 이미 죽은 씨알이라고
처음부터 갈라진 심장은 이미 죽은 젊음이라고
정의를 내치든지 이익을 내치든지
영혼을 내치든지 성공을 내치든지
젊은 날에 두 개의 길은 없다고
마음을 울렸던, 청년 편지 속 책의 구절을 인용한다.
어중간은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꿩 먹고 알 먹는,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일거양득의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매정한 듯 보여도 이게 진실일 겁니다. 다수의 정치친들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양심을 팔지 않던가요? 그들은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밥을 줄 주인에게 꼬리 치는 개처럼 아양 떠는 이들을 볼 때마다 역겨움과 아울러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내치든지 이익을 내치든지 영혼을 내치든지 성공을 내치든지." 시인의 일갈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혼곤한 잠에 빠져드는 이들의 어깨를 후려치는 장군죽비입니다. 같은 책, 15~16쪽.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우리는 늘 남에게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갑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우리를 마구 몰아잡니다. 경쟁은 언제나 타자 배제적입니다. 그의 존재는 늘 나의 안위를 위협하기 때 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도록 부추기는 세상은 우리에게 우정과 평화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은 '다른 소리'를 내는 이들을 싫어합니다. 다른 소리를 내는 이들은 사회 통합을 깨뜨리는 불순분자로 취급됩니다. 국가주의에 사로 잡힌 이들일수록 '일사불란'을 사랑합니다. 차이에 대한 존중 은 물론 없습니다. 판화가인 이철수는 평화란 “누구도 제 빛 깔 잃지 않고 조화롭게 하나 되는 조각보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폭력은 타자를 무리하게 동화시키거나 굴복시키 기 위해 사용하는 힘입니다. 같은 책, 16쪽
다른 하나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P.24)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같은 책, 17쪽
당연의 세계에 갇힌 이들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같은 책, 45쪽
회의는 비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더 깊은 인식에 이르기 위한 통로입니다.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은 불안정합니다. 오랫동안 확고한 믿음과 주저하지 않는 순종을 요구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치된 이들에게 이 말은 매우 불경스럽게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의라는 통과제의를 거치지 않 은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단 한 번의 타격으로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리 혹은 교회의 가르침은 누군 가의 머리를 덮는 쇠항아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책, 47쪽
저 역시 오늘의 젊은이들이 참 어려운 여건 속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압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눅진한 현실에 붙들린 채 사유의 주체가 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어려우면 왜 현실이 그 모양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고, 그것이 불의한 구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확고하게 편입된 이후에 우리가 상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이 설정해 놓은 경계 안에서 사고하고 경쟁한다면 우리는 늘 존재의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속한 사회적 세계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시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붙들어 매는 것인 동시에, 삶의 준거점을 '욕망'이 아니라 '사랑'에 두고 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중심이 된 성전 체제는 스스로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성전 체제와 대립하셨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악취가 나는 법입니다. 탐욕과 결합한 종교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는커녕 생명을 위축시키는 기제가 됩니다. 같은 책, 49쪽
예수님은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는 세상, 폭력과 착취가 일상이 된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질서가 생명을 질식시키려 할 때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리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진보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진보의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란 바로 그 길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시련인 동시에 영광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신앙의 토대는 확고합니까? 주제넘은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또 주님이 우리를 어느 길로 인도하시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책, 50쪽
가난해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고달픈 나날을 잊기 위하여 때로는 폭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들 편에 철저히 섰던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음주라거나 흡연, 우상숭배 따위의 자잘한 도덕문제를 강조함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악을 은폐하기 위한 거대한 자금을 동원하는 현대의 바리새파들에 의하여 예수 죽음의 참된 뜻이 끊임없이 거짓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서준식 옥중서한』 노사과연. p.207. 재인용.) 같은 책, 67쪽.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면글면 애를 써보지만 세상은 날로 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같은 책, 79쪽
"우리가 기초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일견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시스템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직접 사회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주어진 자리에서 기독교적 삶을 견지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같은 책, 82쪽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삽니다. 경쟁은 타자를 소중한 이웃으로 보지 못하게 우리 마음에 차단막을 치곤 합니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다른 이들과의 나눔은 생각하기 어려워집니다. 인간은 본래 경쟁'하는 주체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소설가 존 시는 "경 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쟁은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지 필연적인 삶의 양식이 아닙니다. 경쟁은 평화나 공존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같은 책, 83쪽
돈의 유혹에 빠지면 그 '순수한 수단'을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점이다. 즉 지구는 자원이 되고, 우리의 시간은 '노동'이 되고, 우리의 관계는 이용해야 할 '연줄'이 된다. (데이비드 로이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불광출판사. p. 49. 재인용.) 같은 책, 85쪽.
야나로스 신부여, 너는 부끄럽지도 않느냐? 왜 너는 나에게서 충고를 바라느냐? 너는 자유롭고--나는 너를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었노라! 너는 왜 아직도 나에게 매달리느냐? 참회를 그만두고, 야나로스 신부여, 몸을 일으켜 스스로 책임을 맡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충고를 바라지 말아라. 너는 자유가 아니더냐? 너 스스로 결정을 내려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쟁과 신부』. 열린 책들. p.236. 재인용.) 같은 책, 87쪽
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들어오게 하여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p.192. 재인용.) 같은 책, 110쪽
김현경 선생은 환대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번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긴급한 신앙적 실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책, 110쪽
무슨 일을 해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일종의 허무주의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의 결과만 생각한다면 그런 허무주의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잠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불의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패배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그 일을 완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교사라 칭함을 받는 파커 파머는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은 '실적'을 쌓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 는 일과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일에는 '실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겠다는 헌신의 마음뿐입니다 (『일과 창조의 영성』 아바서원, p.140 참조) 같은 책, 122쪽. 부분 재인용.
"절망에 빠진 사람들, 길을 잃은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은 '믿음, 소망, 구원'(고전 15장에 나오는 '사랑' 대신)을 제공받는다." 사랑은 자기 초월인 동시에 자기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웃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는 행위가 사랑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구원으로 간편하게 대치합니다. 클라렌스는 그런 행태를 꾸짖으며 조롱조로 말을 잇습니다. "그중에 제일은 구원이라" (Dallas Lee. 『The Cotton Patch Evidence』. Wipf & Stock, pp. p 191. 재인용.). 제국적 삶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한 기독교가 구원 담론을 통해 순치되었음을 그는 그렇게 지적한 것입니다. 같은 책, 134쪽
게임의 룰을 어기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젊은이들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분노에 집중할 때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관용의 마음이 스러진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서 경쟁하려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힘 있는 이들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사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의 연대에 무관심해지고, 공동체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차가운 공정함에 대한 집착은 결국 차가운 세상을 낳게 마련입니다. 같은 책, 178쪽
정의는 강자의 편익이라고 말했던 트라시마코스의 진술이 여전히 통용되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같은 책, 178쪽.
성경에서 공의는 사법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율법은 빚을 삭쳐 주는 해인 면제년이 다가온다고 하여 궁핍에 처한 이들을 냉대하거나 꾸어 주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신 15:11). 희년이 되면 빚에 몰려 땅을 남에게 넘긴 이들은 자신이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고, 종으로 팔렸던 이들도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 25:10).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한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요구는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하나님의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뿐입니다. 같은 책, 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