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는 예언을 볼 수 있는 통찰력, 그리고 기다림
매 방학마다 기윤실 교사모임에서 수련회를 진행한다. 나는 2019학년도 여름 방학부터 기윤실 교사모임의 모든 대면 수련회에 참석했다. 그 어떠한 다른 이유보다도 오직 생존을 위해서 참석했었던 기억이었다. 수련회를 다녀오고 나서야 다음 학기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생존이란, 그리스도인 선생님으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기고, 먼저 낮아지며 학교를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도 비슷했다. 방학식(7.17), 동아리 체험활동(7.18), 사제동행 캠프(7.19~21), 1급 정교사 자격 연수(7.21~8.4), 교사모임 수련회(8.7~9)까지, 단 하루의 평일도 쉬어가지 못한 채 방학을 보내고 있다. 주말은 1정 연수 과제와 아내와의 여행 준비로 꽉 채웠다. 쏟아지는 방학 일정의 중반부를 지나가고 있는데도 학교의 밀린 업무(생활기록부 작성)는 해낸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랬기에 수련회를 기대하는 마음보다는 염려가 더욱 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가 선택한 수련회의 자리는 나에게 위로와 통찰력이 가득한 시간을 안겨주었다.
구약의 이야기(Narrative)는 추방과 해방의 반복과도 같다. (이를 신약에서는 탕자의 비유로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성경 기록 상 인류 첫 살인자로 기억하고 있는 가인은 동생을 죽임으로 가정에서 추방된다. (창세기 4장 1절~25절) 하나님은 이런 가인을 보호하기 위해 징표를 주시며 살해 위협을 면하여주지만, 애초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그다지 믿음이 없는 가인은 그 증표를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들로 자신의 몸을 지켜낸다. 첫 번째로는 성을 쌓고, 이어서는 두터운 가족주의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한다. 하나님의 증표 대신 성과 가족을 의지한 가인은 실제로 세상에서 뛰어난 성공과 성취를 이루어낸다. 가인의 자손들은 각각 목축업의 조상 / 관현악의 조상 / 대장장이의 조상의 칭호를 얻으며 한 성읍의 대표로 자리매김한다. 세상의 시점에서는 하나의 성읍을 이루고, 또 세 사업을 모두 성공했으니 엄청난 성취이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가 7배, 그리고 77배라고 이야기하신다.
창세기 39장의 긴 부분을 할애하여 족장시대가 서술되는데, 그중 12장부터 25장까지 14장이 아브라함의 이야기, 26장이 이삭의 이야기, 27장부터 50장까지 22장이 야곱(+요셉&이스라엘)의 이야기로 구성이 된다. 물론 이삭의 이야기가 25장에도, 27장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오직 이삭의 이야기만 다룬 부분은 고작 1장에 불과하다. 분명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민족을 이룰 축복을 이어받은 이삭인데, 왜 그 삶에 대한 이야기는 한 장밖에 다루어지지 않았을까. 강사 목사님께서는 이삭이 믿음의 2세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다. 직접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오로지 귀로 들어서 알게 된 내용뿐인 사람들이라 표현하신다. 아브라함처럼 생생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채 이삭은 그저 부모님에게 그 역사와 전통만을 귀로 들어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안에 이삭 또한 물론 포함되어 있지만 온전히 축복의 통로인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다고 평가받는다.
마치 가인처럼 추방당한 삶을 살지만, 가인과는 전혀 다른 전환점을 통해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사람이 창세기 27장부터 등장한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해내지 못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야곱도 비슷한 가정 내 분위기 안에서 결국 추방되어 가인과 같은 삶의 방향을 가질 뻔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갓이 두 쌍둥이를 임신하였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날 것이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예언하셨다. (창세기 25장 22, 23절) 이를 리브가가 들었고, 이삭에게도, 그리고 에서와 야곱에게도 리브가는 분명하게 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삭은 둘째 야곱이 아니라 첫째 에서에게 모든 축복을 주려고 했다. 고대 근동의 규례 상, 첫째에게는 다른 자녀들이 받을 유산 몫의 두 배만큼 주게 되어있다. 즉, 첫째 에서에게는 2/3, 둘째 야곱에게 1/3을 주어야 한다. (야곱이 받아야 할 유산의 두 배를 에서가 받아야 하므로) 여기에서부터 이삭이 첫째 에서를 향한 편애가 드러난다. 2/3를 주었어야 할 축복을 전부 다 주려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분명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하였으니, 축복의 방향성은 첫째 에서가 아니라 둘째 야곱을 향해야 했다. 하지만 이삭은 그러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리브가는 야곱과 함께 사기극을 연출한다.
리브가가 애쓰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야곱을 향한 약속을 이루실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리브가는 야곱과 함께 이삭을 속여 민족을 이룰 약속을 훔쳐낸다. 현명하고 신실한 리브가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음에도 리브가는 가정을 산산이 깨뜨리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이 선택 이후, 리브가는 구약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야곱은 에서와 부모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다. 에서는 버림받은 리브가로부터 집을 나온다. 한 번의 사기극으로 리브가와 이삭은 두 아들을 동시에 잃는다. 자녀를 통제하는 방법으로는 자녀들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 없다. 아니, 자녀는 애초에 부모가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존재가 어니다.
이 사기극의 끝은 어떻게 되던가. 20년이 지난 후, 야곱과 에서는 결국 다시 만난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었을까? 에서는 사병을 400명이나 이끄는 대족장이 된다. 에서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병력을 이끌 때 300명의 사병을 이끌었던 적이 있다. 그러므로 에서는 할아버지 때보다 더 큰 규모의 부족을 이룬 것이 확실하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주인님(My Lord)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Your Servant.)라고 부른다. 리브가의 가정을 뒤집어 놓은 사기극은 어떠한 것도 바꾸어내지 못했다.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가인과 같이 에서는 400명의 사병을 거느리는 대족장이 되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예언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형을 섬기고 있다. 세상의 성공 기준으로 본다면 가인과 에서의 삶이 더 돋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의 놀라운 축복을 권력 투쟁 없이 이어받았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채 살아왔던 이삭의 삶이 더 찬란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자신을 소개할 때 '야곱'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대어보지 못한 야곱의 삶은 참 비루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 하나님의 민족이 된 것은 결국 야곱의 자손들이었다. 가인과 같이 야곱도 똑같이 가정에서, 그리고 부족에서 추방당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증표를 주셨듯,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찾아가신다. 가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지만,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여기서 가인과 야곱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구나.'라고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렇게 이삭과 달리, 야곱은 믿음의 2세대가 아니라 믿음의 1세대로, 온전히 하나님을 경험한 세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창세기 27장 18절,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사기극을 거의 마치는 순간, 아버지 이삭이 질문한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이때, 야곱이 자신의 이름 대신 형의 이름을 대답할 때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2/3의 재산만을 나누어주어야 할 형에게 자신의 몫까지 모든 축복을 전해주는 아버지를 보면서 어떠한 마음을 느꼈을까? 야곱은 에서만 바라보는 아버지 이삭에게 버림받았고, 에서는 어머니 리브가에게 배신당했다. 단 한 번의 사기극은 굳건해 보이던(하나하나 뜯어보면 전혀 굳건하지 않았다.) 가정을 한 순간에 분해시켰다.
만약, 하나님으로부터의 예언을 온전히 믿는 야곱과 리브가였다면 어떠하였을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온전히 믿은 리브가와 야곱이었다면 이 추방과 해방의 스토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까. 장자의 권한을 사기 위한 팥죽이 아니라, 넉넉함으로 기쁘게 나누어주는 팥죽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할 때, 야곱은 에서 곁에서 형이 받는 축복을 마음 다해 기뻐해주지 않았을까.
부모가 자녀들을 감싸 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집을 떠나 벧엘, 하나님의 집으로 가도록 격려하고 응원해주어야 하겠다. 부모님들의 보호라는 이름의 속박이 오히려 자녀들에게 해방을 향한 갈망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리브가의 선택을 보며, 내 선택과 삶이 계속 비추어졌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예언을 분명하게 들었다. 자신만 들은 것이 아니라 주변의 모두가 들었다. 아주 확실한 예언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상황은 예언과 전혀 다르게만 흘러갔다. 나도 비슷하다. 학기 초, 아이들의 명단을 받으며 아이들의 기초조사서를 받고 한 명 한 명 상담을 진행하면서 반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분명히 들었다. 2학년 11반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을 분명히 나는 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아이들의 모습과 그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노력과 열심을 들여서 이 상황을 바꾸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계속 앞선다. 내 노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내야 할 것만 같다. 노력과 열심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과 헌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방향성일까.
아이들의 학업 성취가 100% 일 때, 나는 생활기록부를 120% 수준으로 기록한다. 학생이 일구어낸 내용을 쓰는 대신, 학생이 일구어내길 바라는 성취 수준까지 생활기록부를 작성해 준다. 하지만 이 거짓말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그 학생을 향한 놀라운 예언을 이루어지게 될까?
오히려 거짓말이 더욱더 빠르고 탁월한 삶을 보장해 주는구나.를 나는 경험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새치기를 해야 콘서트장에 더 빨리 입장하는 삶, 사기죄로 100억을 빼앗은 뒤에 10년 징역을 복역한 이후 숨겨둔 100억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선택하는 삶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 순간 저울질한다. '만약 내가 대입 진학 실적과 예배 두 가지 중에 단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할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이 숭덕학원의 비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1%와 49%의 중요도로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예배와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다.
이번 방학 수련회를 통해 두 가지 적용할 것을 찾아내었다.
1. 그 어떠한 것보다 가장 먼저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고 싶다.
2. 맡은 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면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축복하는 메시지를 남겨두고 싶다. (이미 지나간 3년의 아이들에게 이것을 해주지 못해서 아쉽고, 또 미안하다.ㅠ) 한 명 한 명 오롯이 그들 각자만을 위한 예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도하고, 또 축복하는 말을 남기기 위해서는 무척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 자명하다. 한 학생마다 50분 정도면 해낼 수 있는 생일 편지 쓰기 조차 버겁지만, 이 또한 해내고 싶다. 그렇게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생활기록부가 아니어도, 찬란한 수능 성적표가 아니어도 이들을 향한 소망을 볼 수 있는 내가 되면 좋겠다. 맡겨진 반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을 신실하게 믿고 기다릴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