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연수 첫날에 연수 교재와 함께 김상욱 교수님의 책도 함께 받았다. 나는 398쪽의 분량과 두께에 압도되었다. 알쓸신잡 시즌3 보다 책 『떨림과 울림』으로 교수님을 먼저 만났기에 두께가 주는 위압은 더욱 컸다. 『떨림과 울림』은 오롯이 제목에 이끌려서 읽었다. 책의 내용은 제목과 달리 전혀 말랑말랑하고 설레는 내용이 아니었다. 역시나 이번 책도 비슷했다. 방송과 강연에서는 재미없고 어려워서 차마 전할 수 없었던, 교수님이 꼭 담고 싶었던 모든 내용을 그나마 쉬운 내용만 추려서, 더욱 간단하게 다루셨다. 책의 내용은 대학교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물리학과 전공생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단, 대학교 과정만 없을 뿐, 고등학교 자연과학 과목의 내용을 재미있게(교수님 개인의 주관이다.) 풀어 서술해 주신다.
수학과 선생님들이야 고등학생 시절 자연과학 과목을 모두 공부하셨으니 어려움 없이 책을 읽으실 수 있겠지만, 함께 강연을 듣고 책을 읽으실 국어, 영어과 선생님들에게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비문학 독해를 하시는 느낌이셨을 테다. 고등학교 자연계열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게끔 추천하고 싶지도 않은 책이다. 398쪽이라는 책의 분량이야 발췌독을 권하면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고등학교 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의 모든 내용을 다루고 있어 (물화생지 모든 교과목을 정말 모두 다룬다.), 지금의 고등학생들에게 권하기 어렵다. 물화생지 4과목을 모두 선택해서 수업을 듣는 학교가 별로 없는 현재의 교육과정 상, 그저 간단한 독서감상문 혹은 독서 수행평가를 위한 책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책의 두께에 비해 출간 의도는 명확했다. 물리학자가 바라본 세상을 기술(記述)한 책이다. 사물(物)의 이(理)치를 다루는 학문답게 물리학 만으로 세상을 '어느 정도'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든 층위의 세상을 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교수님의 판단이셨다. (물리학만으로 온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물론 많다. 이를 교수님은 '물리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온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는 물리학부터, 이어서는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 사회과학을 모두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들을 상세하고 보다 쉽게(? 다시 말하지만 교수님 개인의 주관이다.) 표현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책의 내용과 목차를 요약하고 정리해 보았자, 유익이 그다지 없을 듯하니 책을 읽으며 들었던 나의 질문들과 생각들로 서평을 채우고 싶다. 1정 연수 마지막 날, 강연의 기회가 있어 질문을 6개 준비해 갔다. 그중에서 고작 두 개만 답을 들을 수 있었기에, 아직 답을 채우지 못한 질문도 많다. (그중, 여기에는 4가지 질문만 실어보았다. 나머지 두 가지는 책의 내용과는 관련이 적은 '자연계열 학생들에게 추천해 주실 인문학 책 1권, 인문계열 학생들에게 추천해 주실 과학 교양서 1권' 같은 질문들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을 정신적으로 묶어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신, 국가, 민족이라는 상상의 허구를 만들 사제도 필요했을 것이다.
333쪽, 같은 책
1. 과학으로 존재성을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교수님의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허구'라는 표현은 제게 놀라운 통찰력을 안겨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교수님께서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시는 것같은 느낌(13장에서 다루는 '느낌')이 들었다. 신과 국가, 민족들을 '상상의 허구'로 말씀하시는 부분, 3부 말미의 에세이에서 다루셨던 '사랑'으로 대표되는 감정, 인공지능과 신경망, 그리고 정보(information)를 다루시면서 말씀하셨던 인간의 '의식'까지. 교수님께서는 물리량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성을 모두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과정을 가져가시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과학적으로 그 존재성을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전제하셨던 걸까?
답변 : 물리학에서는 관측자(인간)와 상호작용 가능한 어떤 것들만 존재성을 논할 수 있다고 하셨다.
물리학에서의 상호작용은 현재까지 관측된 4가지 힘으로만 작용할 수 있다고 하셨다. 즉 중력, 전자기력, 두 가지 핵력을 기본으로 한 상호작용이 아닌 모든 것은 관측될 수 없고, 그것에 대한 존재성을 논하는 것이 물리학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하신다.
2. (답변 O) 빅뱅 직후 초기 우주에서 원자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뭉치기 시작했던 이유는?
쿨롱상수는 9.0*10^9인 반면, 중력상수는 6.7*10^-11로 대단히 작다. 그래서 교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들은 그토록 잘 뭉치면서도 우주 공간에서 대전되지 않은 유리구슬 두 개는 서로 뭉치지 않는다. 양자세계로 가더라도 중력의 크기는 변하지 않는데, 왜 수소(또는 헬륨) 원자는 뭉칠 수 있게 되었을까? 꼭 수소/헬륨이 아니더라도, 원자들이 어떻게 처음 뭉칠 수 있게 되었을까?
답변 : 최초의 우주에서도 힘은 네 가지만 존재했다. 전자기력, 중력, 두 가지의 핵력. 핵력은 원자핵 내부에서만 작용하는 힘이기에 생각하지 않는다. 수소와 헬륨은 전자까지 포함하여 중성이므로(수소 분자 기체, 헬륨 원자 기체), 전자기력의 작용도 없다. 무척 작은 중력이지만, 우주에 작용하는 힘이 중력 하나뿐이므로, 천천히 원자들은 가속하면서 뭉치게 된다.
(시간이 짧아 다시 여쭈어보지 못했다.ㅠ) 수소 분자가 중력에 의해 뭉치게 되다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분자 내부의 전자끼리 부딪칠 것이고, 그럼 그때부터는 전자기력이 작용할 텐데. 왜 그때는 반발력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전자기력의 반발력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6000도의 온도가 필요한데. 이것은 그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 물리학만으로 온 세상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다. VS 다양한 학문을 통해 세상을 이해해야만 한다. 두 의견 중 교수님은 왜 두 번째 주장을 선택하시게 되셨는지?
사물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인 물리학으로 세상을 모두 설명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연결하는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그러할 것이다. 반면, 교수님은 세상을 물리학의 영역으로만 다루려고 하시기보다는 다양한 인문학의 영역을 걸쳐 다니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쓰시는 듯하였다.
("물리학자의 시각으로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다는 뜻이다." 10쪽. 같은 책)
물리학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노력 대신, 인문학과 물리학을 융합하여 세상을 이해하기로 결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을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을 넘어 다양한 학문이 필요하다는 결론(8쪽, 같은 책)을 내리시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으실까?
4. 미래의 과학은 세상을 모두 규명할 수 있을까?
교수님께서는 물리학자의 관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번 책을 지으셨다. 또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 또한 각자의 관점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한 분투를 요청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과, '세상을 온전히 규명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의 과학은 세상을 모두 규명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모든 층위의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교수님이 이야기하셨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의 연구를 통해, 모든 층위의 세상을 규명해 낼 수는 있을까?
책을 읽고 교수님의 강연을 들으며 한 가지 확신이 더욱 굳건해졌다.
드디어 인간의 합리성은 종교로부터 과학을 분리시켰다. 즉, 신이 주관하지 않아도 지구가 생길 수 있다.
물론, 신이 주관하지 않아도 지구가 생길 수 있다.라는 명제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필요조건도 아니다! 독립인 명제이다.) 그저 분리되었을 뿐이다. 과학으로 '세상이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과학으로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온전히 과학과 종교가 분리되었으니, 우리는 이제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믿음의 기로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신이 세상을 지었다고 믿거나, 저절로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믿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만을 선택해서 믿어야 한다. (나의 신앙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말씀만으로 온 우주를 직접 지으시고, 중력 상수와 쿨롱상수, 두 가지 핵력을 직접 정하셔서 지금의 세계를 있게 하신 하나님"이다.)
4세기부터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영향력은 20세기에 끝났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과학적 영향력도 이제는 끝났다.
쿠르트 괴델(Kurt Gödel)이란 이름의 수학자로 인해 수학이 쌓아올리려던 바벨탑은 결국 완성할 수 없었다.
수학이 자기 자신을 향한 완전성을 잃어버리고서야, 수학은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
기독교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종교의 이름으로 쌓아두고 있는 카르텔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과 시간에 이웃을 먼저 보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믿음과 사랑만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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