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편지에 이어, 김기석 목사님의 책을 이어서 읽었다. 19년에 출간된 청년편지는 2016년부터 18년까지 한 QT책에 기고된 글들을 묶어낸 책이다. 이 책은 23년에 출간되었는데, 청년편지 이후, 코로나를 지나치며 작성된 짧은 칼럼들을 담고 있다. 책의 방향성은 비슷하다. 비슷한 방향성의 책을 연거푸 읽으니, 저자가 어떠한 삶의 방향성을 지향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청년편지 때도 그러했듯, 이번 책은 더 담아두고 싶은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계속 내 마음을 찔렀던 주제가 있다. 추상적인 선함은 쉽지만, 가까이의 사람들을 살피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다. 온 세상을 사랑하거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어렵다. 특별히 인터넷 공간에서만,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안부를 묻고 전하는 일은 간편하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나는 항상 더 높은 차원의 선함을 꿈꾸고, 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정작 내 곁에 일어나는 일에는 무심하였다.
최근 몇 주간 교무실의 분위기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서 마찰이 있었고,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선생님들과 갈등이 있었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다양한 각도와 차원에서의 행정적인 절차가 진행되었다. 행정 처분의 결과가 여러 선생님들께 마뜩잖았으며, 위원회의 절차 속에서 드러난 위원들의 워딩은 해당 선생님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이러한 교무실에서 쾌적한 나의 일상을 위해 나는 교무실의 상황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학급 경건회에서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도 교무실 속 선생님들께, 그리고 해당 학생의 마음에 환대를 베푸는 일에는 무심했다. 심지어 올해 나의 교무실 속 업무는 '생활지도'이다.
2월에 처음 부서 배정을 받을 때에는 연구부의 방과후 학교 & 기초 학력 보장 지원이었다. 하지만 생활지도 업무를 어려워하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1:1로 업무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생활지도 대신 연구부 업무를 받으신 선생님이 이번 갈등으로 가장 크게 상심하셨다.
온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랑은 대개 관념 속에 존재한다. (중략)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인터넷 공간에만 머물고 있다면 상관없다. 문제는 우리가 산뜻하게 유지하고 싶은 일상의 공간에 그들이 틈입할 때다. 그때마다 우리는 경계심을 품고 대하거나, 마음의 담을 쌓아 그를 밀어내려고 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는데, 우리는 환대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더 많다. 40~41쪽, 같은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은 아끼지 않는 한 귀부인에게 어느 의사가 한 말을 들려준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더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관념으로는 인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내게 불편함을 주거나 비위에 맞지 않으면 그를 증오하는 것이 인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한층 불타오르게 되는 역설을 그들의 입을 빌어 전하려 했던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노동과 인내를 요구한다. 168~169쪽, 같은 책.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산다. 각종 사고와 자연재해 그리고 테러와 전쟁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격하며 함께 아파한다. 가끔은 재해를 만난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정작 손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는 눈길을 주려 하지 않는다. 183쪽, 같은 책.
내게 추상적인 사랑은 너무나 쉽다. 하지만 가까이의 사람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7월의 서이초를 보내며, 내가 속한 교사 공동체(좋은 교사 운동)에서는 9월부터 교사 돌봄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 캠페인에서는 열 분 이상의 선생님에게 안부를 묻고, 다섯 분 이상의 선생님의 손을 잡고, 세 분 이상의 선생님을 찾아가며, 두 분 이상의 선생님과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눌 것을 요청했다. 캠페인을 보자마자 나는 '으악 이걸 어떻게 해...?' 싶었다.
나는 사적으로 함께 저녁을 먹는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한 분도 계시지 않다.(당연한 것일까? 해방촌의 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매주 선생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어쩌다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 사적으로 식사를 함께 했던 선생님은 물리 선생님 한 분, 그리고 사제동행 캠프를 함께 준비했던 한국사 선생님 한 분과 체육 선생님 한 분이다. 목사님과 그토록 친하게 지냈지만, 학교 밖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은 없다. (목사님의 퇴직 이후에야 겨우 해냈다..!) 숭덕여중 시절부터 오늘까지 만 2년 8개월 간 선생님들과의 교제는 고작 두 번 있었다. 가까이의 사람을 살피고 격려하는 것이 내게 이토록이나 어렵다.
연천에서 군 복무를 하며 사단 교회를 다니는 동안, 사단 사령부 한 장교의 사모님으로 이사 온 한 전도사님의 가정에 자주 초대받았다. 26살, 아무것도 모르지만 고작 1년이라는 경력이 있다고 진급까지 시켜주었으나, 실력은 여전히 미천하던 시절이었다. 켜켜이 쌓인 일들을 겨우 치워내던 시절, 사단 전입 동기 친구 한 명과 함께 보낸 전도사님과의 시간이 여전히 무척 큰 위로로 기억한다. 전도사님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군인을 남편으로 맞으셨었다. 그리스도인 군인 남편을 두는 것 또한 큰 결단이 필요한데, 믿지 않는 직업 군인과의 결혼은 더 큰 결단이 필요하다. 전도사님께 결혼한 이유를 물었을 때, 함께 할 사람으로는 믿음이나 신앙보다 온유와 인애가 중요하다고 대답해 주셨었다.
이 에피소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일부이다. 종이 분별의 기준으로 택한 것은 종교도 가문도 경제력도 아닌 '인애의 행동'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그를 돕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34쪽, 같은 책.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신앙, 믿음, 이런 것들이 아닌 듯하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따뜻한 살핌이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선교단체(YWAM) 대학 사역을 통해 '환대(Hospitality)'의 개념을 배웠다. 하지만 여전히 환대를 살아내지 못하는 듯하다. 가까이서 하나씩 살펴 가르쳐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환대의 삶을 살아내면 좋겠다. 아내는 잘 하는데 나는 이게 너무 어렵다... 아내가 관계할 수 없는 내 주변의 사람에게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함께 해낼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랜트 연구 결과로 얻은 교훈이 뭐냐는 질문에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라고 대답했다. 친밀한 관계가 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자발없는 삶으로 하강하지 않도록 지켜주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는 속도를 늦추더라는 것이다. 150쪽, 같은 책.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맞아들일 여백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때부터인지 흉허물 없이 이웃을 맞아들이기도 했던 집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변했고, 모처럼 벗들을 만나도 설면하기 이를 데 없다. 직접 대면보다 익숙한 것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다. 그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글에 '좋아요' '힘내요' '슬퍼요' 등으로 공감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의 현실에 깊이 연루되지는 않는다. 삶의 의미는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150쪽, 같은 책.
누군가를 염려하며 애태우는 것, 그것이 인간됨의 본질이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허둥거리는 동안 우리는 무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누군가와 연루되기를 꺼린다. 그렇기에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그늘 또한 짙어간다. 176쪽, 같은 책.
이웃을 살피고,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한 이유가 그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을 살피는 시간과 노력으로 인해 내 삶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평온한 일상을 위해 고개를 돌리고, 무시하면 당장의 내 안락함과 쉼은 보장될 테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그늘은 짙어간다. 주변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잊어버리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다짐한다. 용산의 학교를 떠나 이곳 인천으로 들어올 때, 떠나는 학교의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때부터 내 삶의 방향성은 일 잘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꺼이 주변을 더 살피고, 누군가와 연루되어 나의 시간을 쓰는 데 기뻐하는 삶을 기대한다.
학교에서 일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학생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도록 만드는 것일까? 같은 성적과 생기부로 더 좋은 대학을 진학하도록 돕는 것일까? 나를 소개할 때 꼭 사용하는 표현에서처럼, 나는 수학이 학생들의 꿈을 발목잡지 않도록 애쓰고 싶다. 그 애씀은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 '극대값과 극소값만을 알 때 극값을 갖도록 하는 x의 값을 10초만에 찾을 수 있도록 공식을 외우자'라고 안내하는 것일까?
억울한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생산성을 높이고 인건비를 줄이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위험은 외주화하고 이익은 독점하려는 자본의 욕망 뒤에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웃고 있다. 76~77쪽, 같은 책.
경제적 이익이 인간적 존엄을 압도할 때 세상은 디스토피아(dystopia)로 변한다. 디스토피아 주민들의 특색은 무정함이다. 타자의 고통은 주목되지 않고, 약자들의 신음은 경청되지 않는다. 욕망에 취한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은 불편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중략) 무정한 마음이 공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세상은 냉혹하게 변한다. 86쪽, 같은 책.
일단은 경쟁이 내재화된 우리나라에서 아이들이 소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애쓴다. 하지만 가장 먼저는 환대를 가르치고 싶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를 가르치기 위해 누군가를 도태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 방법을 고민하는 습관을 갖도록 가르치고 싶다.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효율성이나 생산성과 결부되지 않은 시간을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25쪽, 같은 책.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우리가 하는 일들은 '성과 있는 일'로 보기가 어렵다.
미국의 위대한 교사라고 일컬어지는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일과 창조의 영성』(아바서원)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부름받은 일은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는 측정 가능한 결과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한다면 이런 일은 오직 패배와 절망뿐일 거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63쪽, 같은 책.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가끔은 지치고 낙심한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마음을 안추르고 다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을 선물로 주신 분에 대한 예의이다. 파커 파머도 가끔 결과가 눈에 띄지 않을 때 실망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친구의 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얼마나 실적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신실한지 여부만 물어왔다." 우리 내면에 세상의 어떤 어둠으로도 지울 수 없는 빛이 스며들면 좋겠다. 63쪽, 같은 책.
성과가 보이지 않고, 변화가 보이지 않는 일이더라도 멈추고 싶지 않다.
교사를 시작할 때의 첫 마음들을 다시 돌아본다. 나는 일 잘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많은 사람보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앞에 놓인 학생들뿐 아니라, 곁에 계시는 선생님들에게도 사랑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쾌적한 일상의 평온을 쫓는 대신 가까운 슬픔을 함께 짊어지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생각을 담고 싶은 글이 너무나 많았다. 하나하나 다 인용하자니, 책 한 권 분량이 새로 나올 듯하여, 아래에 줄인다.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인간은 납득할 수 없이 삶에 던져진 인생의 손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의 손님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상호 파괴와 영원한 혐오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손님은 손님다워야 한다. 그는 『나의 쓰지 않은 책들』(서커스)에서 "손님은 주인의 법과 관습을 받아들일 뿐,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주인의 언어를 익히면서, 그것을 더 잘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주인이 누구이든 독자인 나는 그 주인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손님이 되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의 책임은 처음 왔을 때보다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당을 쓸고 물을 뿌리고 은모래를 깔아 손님을 영접했던 옛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그렇게 손님으로 맞아들이며 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조금은 닮게 되지 않을까? 17쪽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알마. 19쪽, 재인용
타인은 기쁨의 샘일 때도 있지만 우리 삶을 제한하는 질곡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타인을 조종하려는 충동이 우리 속에 스멀스멀 자리 잡는다.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부과하여 그가 내 뜻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권력에의 의지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분수를 모르기에 언제나 한계를 넘는다. 성경은 이러한 과도함 혹은 오만함이 곧 죄라 말한다. 죄는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20쪽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하여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고 말한다.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머뭇거림이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나름의 확신 때문이겠지만 그들은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20~21쪽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효율성이나 생산성과 결부되지 않은 시간을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25쪽
소비사회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은 경탄의 능력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세상은 신비의 장소이다. 무엇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주변의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사물이나 자연 속에 깃든 신비를 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뭘 보아도 심드렁하다. 땅의 인력에 이끌리는 동안 하늘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는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주시기는커녕 들에 핀 꽃들과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를 보라 하셨다. 그것들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솜씨와 마음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걱정과 근심의 무게는 줄어든다. 삶의 여건은 달라지지 않아도 삶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질 수 있다. 그 눈이 열리는 순간 더 이상 세상을 경제적 논리에 따라서 보지 않게 된다. 26쪽
답하기 어려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꽤 긴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삶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상대방을 골탕 먹이거나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삶의 과정 중에 비롯된 진실한 질문이라면, 굳이 정답을 찾아 제시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대답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일단 질문자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에 깊이 공감하고, 그와 동일한 질문 앞에서 "나는 이런 선택을 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30쪽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길들이려 한다. 그 체제 안에 머물 때 우리 영혼은 납작해진다. 비루한 일상 속에 허덕이는 동안 우리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남는다. 분주함 속에서 바스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높이와 깊이의 차원을 되찾아야 한다. 세상의 평가와 무관하게 우리 삶이 무한히 소중하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지만, 우리가 써가는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은결든 마음에 하늘빛이 스며든다.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더불어 그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32~33쪽
일평생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신앙은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동원하는 편리한 기제가 아니라 삶을 이끌어가는 견인차이다. 세상의 모욕과 박해도 그들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한다. 얼마전, 구순을 바라보는 원로 사회학자 한 분과 만났는데, 대화하는 동안 마치 죽비로 맞는 것 같았다. 약 3시간 내내 그 원로는 '비움', '몸의 부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에게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척박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삶의 내용이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 하지 않던가. 그는 하나님의 꿈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경이로운 집중력이었다. 34쪽
나희덕 시인은 "나에게 시는 닻이고 돛이고 덫"이라고 말했다. 믿음 또한 그러하다. 믿음은 우리 마음이 표류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닻이고, 바람을 타고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도록 이끌어주는 돛이다. 그러나 자기 확신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덫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진리와 자유의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37쪽
온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랑은 대개 관념 속에 존재한다. (중략)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인터넷 공간에만 머물고 있다면 상관없다. 문제는 우리가 산뜻하게 유지하고 싶은 일상의 공간에 그들이 틈입할 때다. 그때마다 우리는 경계심을 품고 대하거나, 마음의 담을 쌓아 그를 밀어내려고 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이라는데, 우리는 환대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가 더 많다. 40~41쪽
세상의 아픔을 보고 차마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모욕을 당하거나 위험에 빠지면서도 고통받는 이웃들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언뜻 드러나는 하늘을 본다. 그들이야말로 무정하고 사나운 세상을 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팔을 붙드시는 사람들이다. 41쪽
우리는 이웃 사랑이라는 당위와, 곤경에 처한 이들과 연루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 자아 사이에서 바장인다. 조금씩이라도 당위의 방향으로 몸을 틀 때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건만, 대개는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양심을 괴롭힐 때 우리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낸다. 고통을 개별화시키거나, 개인의 선한 행동으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사로잡힌 이들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산에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변방에 머무는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41~42쪽
예수님이 많은 표징을 행하시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그분께로 집중되자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들이 염려한 것은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의 해체였다. 그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한 사람의 희생으로 민족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셈법은 간단하다.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교묘한 논리는 악마적이다. 희생되어야 할 개인 가운데서 자기들은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늘 이런 방식으로 작동된다. 42쪽
상황이 위급할 때면 우리는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써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한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우리는 비로소 신뢰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런 용기이다. 추상적인 사랑 담론에서 벗어나 우리 곁에 다가온 사람 하나에게 성심을 다할 때, 문득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43쪽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어느 날 아침 프란체스코가 바친 기도를 소개하고 있다. "주님, 만일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저를 천국에 보내달라고 하기 위한 것이라면 칼을 든 천사를 보내 천국의 문을 닫아버리게 하소서. 주님, 만일 제가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저를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넣으십시오. 그렇지만 제가 당신을 위해서, 당신만을 위해서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팔을 활짝 벌려 저를 받아주소서." 44~45쪽
사랑은 사로잡힘이다. 그렇기에 불가항력이다. 사랑은 계산을 모른다. 45쪽
교회에 과연 희망이 있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희망은 발이 없기에 누군가 어깨에 메고 데려와야 한다. 이 궁핍한 시대에 어리석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세상의 희망이 아닐까? 47쪽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늘 흐름 혹은 변화 속에 있기 때문이다. 49쪽
시내산 언약을 맺을 때도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당신의 뜻을 소상하게 알리신 후 그들이 동의하는지 물으셨다. 바로와 애굽의 관료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동 기계였기 때문이다. 기계는 일의 전모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기계가 고장나거나 마모되면 교체해버리면 그만이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신다. 56쪽
마리아는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아멘"으로 응답한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려던 가멸찬 꿈은 스러지고 호젓한 외로움 속에서 세상의 따가운 시선과 타격을 안추르며 살아야 할 고단한 미래가 남았다. 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마리아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예감했던 것이다. 식민지 백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과 착취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이들을 통해 온다. 56쪽
시인 오규원은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뭐니뭐니해도/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어두운 게 어둠이라는 사실"(「어둠은 자세히 봐도 어둡다」에서)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57쪽
미국의 위대한 교사라고 일컬어지는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일과 창조의 영성』(아바서원)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부름받은 일은 '실적'으로 평가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는 측정 가능한 결과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한다면 이런 일은 오직 패배와 절망뿐일 거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63쪽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가끔은 지치고 낙심한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쓸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마음을 안추르고 다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을 선물로 주신 분에 대한 예의이다. 파커 파머도 가끔 결과가 눈에 띄지 않을 때 실망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친구의 말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얼마나 실적을 올리고 있는지 자문한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신실한지 여부만 물어왔다." 우리 내면에 세상의 어떤 어둠으로도 지울 수 없는 빛이 스며들면 좋겠다. 63쪽
이 이야기는 성전 혹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입지 조건, 투자 가치, 발전 가능성이 아니다. 땅을 신성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토라는 언약 백성이 살고 있는 곳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이라고 선언한다. 그 땅은 무고한 이들의 피가 흐르지 말아야 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한숨이 스며들지도 말아야 한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네온 십자가가 도시의 밤을 밝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또 다른 의미의 애굽이다. 억울한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생산성을 높이고 인건비를 줄이는 일에 집중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위험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위험은 외주화하고 이익은 독점하려는 자본의 욕망 뒤에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가 웃고 있다. 76~77쪽
성경은 계약이 아닌 언약에 근거한 세상을 그려 보인다. 언약 공동체의 핵심은 이익이 아니라 관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우리'이다. 개별적 존재인 '나'를 '우리'로 묶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언약에 참여하는 이들은 공유된 비전에 의해 움직이고, 서로에 대해 책임을 다한다. 교회가 사랑과 우애라는 기초 위에 우뚝 설 때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지 않을까? 77쪽
경제적 이익이 인간적 존엄을 압도할 때 세상은 디스토피아(dystopia)로 변한다. 디스토피아 주민들의 특색은 무정함이다. 타자의 고통은 주목되지 않고, 약자들의 신음은 경청되지 않는다. 욕망에 취한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은 불편하거나 외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중략) 무정한 마음이 공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때 세상은 냉혹하게 변한다. 86쪽
추수감사절 무렵이면 이태후 목사는 칠면조와 칠면조 요리에 필요한 일체의 재료를 담은 바구니를 마련하여 캠프에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의 집에 전달한다. 특정한 장소에 와서 받아가도록 하지 않는 것은 구호품이 아니라 사랑의 선물임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받는 이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하려는 깊은 배려이다. 배려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배려 받음의 경험은 우리 속에 있는 얼음을 녹이는 봄볕이다. 사회적 약자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누군가에게 고향을 선사하는 일이다. 그런 고향을 경험하는 이들이라야 다른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있다. 무정한 세상을 다정함으로 녹이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 아닐까? 88~89쪽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에 슬며시 찾아드는 것이 폭력의 유혹이다. 95쪽
2011년 동일본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한 일본 작가는 그 사건은 수많은 사람이 죽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수만 명의 개별적인 존재가 죽은 수만 개의 사건이라 말했다. 97쪽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숫자로 환원되는 순간 개별적 존재로서의 삶의 서사가 사라진다. 숫자는 슬픔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재난의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은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름들이 환기시키는 사건의 비극성을 숨기고 싶기 때문이다. 각종 사고로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공적으로 호명하는 행위는 무정한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97쪽
통제하기 어려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이다. 재난을 더욱 크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과 분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폐허를 딛고 일어서야 할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할 때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심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이들의 품이 되어주려는 이들은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다. 98쪽
우리 속에는 우리를 지배하는 다른 신이 있다. 자기를 크게 여기는 마음이다. 자기 찬미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다른 어떤 유혹보다 매혹적이기에 더욱 위험하다. 100쪽
편견 없이 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나의 견해가 편견 혹은 오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때 참된 인식의 문이 열린다. 그 통로는 대화이다. 대화는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의 견해를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야 한다. 내 입장을 철회하고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아픔까지 감수해야 한다. 자기 편견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그런 아픔을 겪는 게 낫다. 117쪽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불안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일수록 확실한 것에 집착한다. 120쪽
'의심하는 도마'라는 오명을 썼던 도마가 복권되어야 한다. 그는 합리적 의심을 통해 보다 확실한 진리 인식에 이르렀다. 의심 혹은 회의는 진리의 적이 아니라, 더 깊은 확실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안내인이다. 121쪽
성급한 사람은 기다릴 줄 모른다. 마음에 한번 후림불이 당겨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버르적거린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은 시간을 지속이 아니라 파편으로 경험한다. 정보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면서 조바심, 부산스러움, 불안이 우리의 기본 정서가 되고 말았다. 배설하듯 쏟아내는 성급한 말들이 선량한 사람들의 감성을 해치고, 성급한 판단과 행동은 다른 이들이 다가설 여백을 제거한다. 130쪽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본 히브리의 한 지혜자는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전 9:11)라고 말했다. 성급함이라는 원죄에서만 벗어나도 삶의 무게와 비애는 줄어든다. 피난처를 찾아 우리에게 다가온 이들을 따뜻하게 그느르는 것이야말로 어엿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이 또 있을까. 131쪽
이 에피소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일부이다. 종이 분별의 기준으로 택한 것은 종교도 가문도 경제력도 아닌 '인애의 행동'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면서 그를 돕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34쪽
기독교인들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를 지금 기다린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일까? 성경은 그분이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생각하거나, 쾌적한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이들로 여겨 멀리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오늘 그분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해도 과연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134쪽
필요를 채우는 일에 몰두하는 동안, 장엄한 세계와 삶의 신비를 볼 수 있는 우리 눈은 점점 어두워진다. 허무의식이 슬그머니 내면에 자리 잡는다. 부지불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허무감을 화장기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에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말들이 범람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사의 방향을 가리켜 보이지 않는다. 희망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각자가 대답할 때이다. 142쪽
그랜트 연구 결과로 얻은 교훈이 뭐냐는 질문에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라고 대답했다. 친밀한 관계가 돈이나 명예보다 중요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자발없는 삶으로 하강하지 않도록 지켜주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는 속도를 늦추더라는 것이다. 150쪽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을 맞아들일 여백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때부터인지 흉허물 없이 이웃을 맞아들이기도 했던 집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변했고, 모처럼 벗들을 만나도 설면하기 이를 데 없다. 직접 대면보다 익숙한 것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다. 그 공간에서는 상대방의 글에 '좋아요' '힘내요' '슬퍼요' 등으로 공감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의 현실에 깊이 연루되지는 않는다. 삶의 의미는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150쪽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은 우리가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통받는 타자들의 삶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을 때 우리 삶은 확장되는 동시에 상승한다. 상승이란 욕망 주변을 맴돌던 삶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의 지평 속에서 세상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부푼 욕망에는 타자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낯선 이들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필요에 응답할 때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은 비로소 바루어진다. 150~151쪽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의 지세가 다른 탓이지." 정약용 선생의 시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릴 때가 많다. 작은 산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에는 큰 산이 들어오지 않는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닫힌 마음이 지옥이다. 161쪽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우정과 환대의 장소를 만드는 이들이 세상의 숨구멍이다. 이들은 눈에 보이진 않아도 작은 산 너머에 큰 산이 있음을 알아차린다. 163쪽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은 아끼지 않는 한 귀부인에게 어느 의사가 한 말을 들려준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면 할수록 개별적 인간, 다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더라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관념으로는 인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이들이 내게 불편함을 주거나 비위에 맞지 않으면 그를 증오하는 것이 인간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개별적 인간을 증오하면 할수록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은 한층 불타오르게 되는 역설을 그들의 입을 빌어 전하려 했던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노동과 인내를 요구한다. 168~169쪽
누군가를 염려하며 애태우는 것, 그것이 인간됨의 본질이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허둥거리는 동안 우리는 무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다. 누군가와 연루되기를 꺼린다. 그렇기에 외로움은 더욱 깊어지고 그늘 또한 짙어간다. 176쪽
좋은 세상을 기다리는 이들은 먼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177쪽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현실에 절망한 볼테르(Voltaire)는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가 더욱 절실한 세상이다. 183쪽
인터넷으로 연결된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산다. 각종 사고와 자연재해 그리고 테러와 전쟁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목격하며 함께 아파한다. 가끔은 재해를 만난 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도 참여한다. 하지만 정작 손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는 눈길을 주려 하지 않는다. 183쪽
골고루 가난하던 시절, 어른들은 단 한 톨의 쌀도 하수구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밥을 다 푼 후 가마솥을 부신 물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가축들 차지였다. 아낌은 인색함이나 궁상을 떠는 게 아니라 삶을 성화하는 일이다. 물건과 사람을 아끼는 것은 이 경박하고 폭력적인 세태를 향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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