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서평

사소하고 평범한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결핍을 평가 절하하지 말았으면.

꿈잣는이 2024. 4. 21. 04:23

 

김혜진(2023). 『우리는 얼굴을 찾고 있어』. 서유재.

 
나보다 열 세 살이나 많은 작가님이심에도, 나처럼 매일 학교에 머무르지도 않으심에도, 늘 나보다 여자 청소년들의 마음을 더 잘 아신다. 안전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학생들의 마음 심리를 잘 살피신다. MBTI검사를 할 때마다 T 성향이 참 높게 나오는 나에게, 여학교에서 학생들의 마음을 그래도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3명 중에 한 분이시다. (아내, 오선화 선생님, 그리고 김혜진 작가님)
 
김혜진 작가님의 책을 읽을 때면 꼭 책의 앞날개 부분의 작가 소개를 꼼꼼히 읽는다. 책 앞 날개의 변화를 보며 또 다른 여운을 갖는다. 가지고 있는 책들과, 약간의 검색으로 앞 날개에 수록된 작가 소개를 모아보았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다. 세상은 너무 좁은 것 같은데, 정말로 좁은 건지 아직 모르는 게 많은 건지 확인해 보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 (프루스트 클럽. 2005년)

내일의 할 일, 일주일의 할 일을 미리 계획해 놓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오늘의 할 일 작업실. 2011년)

붉은 벽돌 틈의 이끼와 오래된 물건에 난 흠집을 좋아한다. 이야기가 거기 꽁꽁 숨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작고 평범한 것에서 시작하는 신비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밤을 들려줘. 2015년)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지닌, 옅지만 견고한 결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 (가방에 담아요, 마음. 2017년)

웃기지 않아도 재미있는 이야기-진지해서 재밌고, 무서워서 재밌고, 새로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귀를 기울이는 집. 2018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집으로 가는 23가지 방법. 2020년)

구겨진 종이 뭉치 속 그림자 같은 이야기, 있는 듯 없는 듯 결국엔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과 조용히 숨겨진 마음에 자리 잡은, 결국엔 벅차게 펼쳐질 이야기를 찾아 문장으로 옮기고 싶다.(완벽한 사과는 없다. 2021년)

시장과 미로와 수수께끼에 관심이 있고, 책 속을 헤매는 것을 좋아한다. 실컷 헤맬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길을 잃었다가 찾아내는 책, 주머니 가득 빛나는 것들을 주워 모을 수 있는 책이면 좋겠다.(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 2023년 6월)

오래 헤아려 보아야 하는, 숨은 마음들에 관심이 있다. 숨은 것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보듬는 글을 쓰고 싶다.(우리는 얼굴을 찾고 있어. 2023년 10월)

 
 
김혜진 작가님의 청소년 소설들을 설명하기 좋은 문장은 2017년 출간된 『가방에 담아요, 마음』와 2020년 출간된 『집으로 가는 23가지 방법』의 작가 소개인 듯하다. 『프루스트 클럽』과 함께 작가님의 성장기 배경을 함께 상상하기 좋았다. 안전하게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풀어내신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밋밋하고 심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상이 무척 소중함을 알게 된 지금의 나로서는 그저 놓치고 지나가버릴 수도 있을 순간들을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또 소중한 기억들을 회상하게 해 주시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끌린다.
 


 
 

평범한 부모의 일상적 조건 속에서도 아이에게 치명적인 결핍이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232쪽, 정혜신. 2013. 『당신으로 충분하다』)

 
『당신으로 충분하다』라는 책을 통해 내가 배운 통찰 한 가지이다. 김혜진 선생님도, 어느 심리학 책에서도 비슷한 통찰력을 안겨주는 표현들을 보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여도 아이는 상처를 입고, 나쁜 의도여도 아이는 상처를 입는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결핍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한 결핍들을 안고 살아가는 학생들을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자주 발견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 친구들을 마주할 때마다 항상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온 마음을 다해 말해주고 싶다.
 
책 속의 태희, 그리고 해솔은 저자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청소년들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배경과 가정 상황을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은 이미 특별한 배경이라고 여겨지기에 너무나 빈번하게 만나는 상황들이다. 더 이상은 '학부모님'이라는 표현으로 학생들의 보호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담임학급 학생의 출결을 상의할 사람으로 학생의 어머님을 먼저 찾지 않는다. '내가 누구와 통화하는 게 좋겠어?'라고 먼저 물어본다. 신학기 기초 상담 때에도 가정의 구성을 물어보지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가족 구성의 빈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그것들이 일반적이고 결핍이 없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평범한 부모의 일상적 조건'에서도 치명적인 결핍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학생들이 '내 어려움은 다른 어려운 누군가의 반의 반도 못 될 거야.'라고 자신의 어려움을 평가절하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비슷한 주제와 내용의 김혜진 작가님의 다른 많은 책의 이야기들이 더 공감되고, 또 위로가 된다.)
 
 


 
 
이전엔 청소년 소설들을 보며 청소년들의 마음에만 센서가 집중되어 있었는데, 작년부터는 어른들의 삶에도 마음이 더 쓰이는 듯하다. (곧 아빠가 될 거라 그럴까?) 세 주인공의 담임 선생님 세 분, 해솔이의 엄마와 아빠, 태희의 엄마와 이모와 이모부. 이들의 마음이 신경 쓰인다.
 
고등학생 때만 해도, 전혀 몰랐다. 어릴 때의 나는 왜 몰랐을까. 이런 어른들도 여전히 '태어나서 평생 처음 맞이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이들 또한 불완전하며, 완전한 사랑을 이뤄내지 못함을 알지 못했을까.
'아니 왜 배울 만큼 배우신 분들이 그러지?'라고 생각하며, 어른들을 더 이해하려고 애쓰지 못했을까. 나는 늘 이러한 오만하고 교만한 생각들로 마음을 가득 채운 채 살았다.
 
지금 따져보면, 내가 학생의 시기에 만났던 많은 어른들은 대부분 배우고 경험하는 데에 집중하는 삶이기보다는 살아남기에 집중했던 시간들이 길었을 테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몸은 노쇠하셨을 테다. 이제는 19살보다 더 약한 체력과 집중력으로 그저 하루를 버티고 계셨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33살 즈음 되니, 19살의 체력과 확연히 다름을 매일 느낀다.)
 
지금 나를 만나고 있는 학생들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아직 원함이 가득하지만, 현실을 살아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자주 본다. 아이들의 배움을 기다려주고, 또 세세히 오랫동안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여전히 나는 학생들을 다그치고, 또 재촉하고, 또 고난 속으로 학생들을 내모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들도 19살의 나처럼, '아니 저 아저씨는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삶의 형태는 전혀 사랑이 없는 사람이네.'라고 회의심 가득 품은 채 학교에서의 매일을 버티고 있지는 않을까.
 
 


 
 

"뭘 해 줄 수 있을 때는 차라리 나아."
아빠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못 해 줄 거 같을 때가 제일 힘들어."
(152쪽. 김혜진. 위의 책.)

 
해솔이 아빠의 짧은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이뿐 아니다. 책에서는 거의 언급된 것이 없는 태희의 엄마와, 태희의 이모, 이모부의 삶이 선명하게 내게 와닿는다. 태희의 이모와 이모부는 어떠한 마음으로 (17-3)년을 살아내셨을까. 그리고도 3년을 더 살아내기로 결정하신 걸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켜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나아가 또 다른 누군가를 세상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은 더 큰 마음과 몸의 짐을 쌓는 것이겠다.
 
내 삶을 이루는 많은 삶의 태도 중 한 가지는 "내가 더 불편하면 되지."이다. 환경과 지구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개수대 없는 학교에서 나무젓가락과 종이컵 대신, 설거지를 해야 하는 수저와 머그컵을 쓴다. 20살부터 타고 다니는 개인 승용차를 33살이 되도록 구매하지 않는다. 학교 건물 안에서 지내면서도 매일 15000보를 거뜬히 채우게 되는 삶의 태도다.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고 싶다. 재정 수입의 30%를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미리 떼어 필요에 따라 후원한다. 하지만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생각과 염려가 많아진다.
 
모든 것들을 잘 해내고 싶다. 학교에서 맡겨진 20여 명의 영혼들을 잘 살피고 싶다. 아내에게도 매일매일의 행복한 삶을 선물하고 싶다. 태어날 자녀에게도 사랑의 결핍 없는 기억과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 태어날 나의 자녀가 죽기 전까지, 지구와 환경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싶다. 하지만 "내가 더 불편하면 되지."의 태도 만으로 이 네 가지 목표를 모두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자신이 없다.
 
 
 
 



사족.
『집으로 가는 23가지 방법』과 『프루스트 클럽』은 서대문과 정동의 거리를 따라 걷는듯한 기분이 들어, 작가님의 삶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듯했다. 이번 책에서는 국립 중앙박물관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해마다 한 번씩은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이 포기했던 경주에서의 이틀을 루아, 해솔, 태희와 함께할 수 있어 경주를 향한 마음이 더 생겨나게 되었다. 중앙박물관의 경천사 십 층 석탑과, 2층 기증관, 메소포타미아관 등등 이미 여러 차례 가보았던 나의 중앙 박물관 기억들이 선명히 남아 나에게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