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서평

아픔과 기쁨. 고통을 넘어서는 자유

꿈잣는이 2024. 4. 27. 08:35

김혜진(2023). 『여기는 시장, 각오가 필요하지.』. 위즈덤 하우스

 

  김혜진 작가님의 판타지는 『아로와 완전한 세계』 시리즈로 무척 유명하기에, 이번 책도 당연히 믿음이 갔다. 판타지 소설 장르 자체가 나의 선호도가 높은 장르는 아니지만, 김혜진 선생님의 책은 일단 읽는 나로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시장 백화점'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남대문 시장이란 배경, 한국적인 감성과 예스러운 어휘와 표현들로 인해 읽는 내내 다른 세상에 방문한 듯했다. 남대문 시장을 단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아, 묘사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넘어가지 못한 적도 많기는 했다.(ㅠㅠ)

 

 

  모라는 '반사의 주문'을 어머님께로부터 받았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위해를 반사시킨다. 모라를 밀친 사람은 자신이 밀쳐지게 되었다. 모라의 필기도구를 망가뜨렸다면, 모라의 것은 멀쩡해지고 자신의 필기도구가 망가지는 식이다. 언뜻 생각하면 '어? 나쁘지 않은데?' 싶은 주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깊이 관계하기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면서도, 동시에 타인과 척지고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반사의 주문은 참 매력적으로 보였다. 부모님이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방편 중, 이것만큼 요긴해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런데 모라는 이것을 풀고 싶었다. 나라면 주문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었을 텐데.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도 저자는 비슷한 고민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실은, 나는 이런 주문을 원했다. 상처가 될 만한 것들을 다 튕겨 내고 좋은 것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나 자신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주문을 걸고 싶었다. 두툼한 보호막으로 스스로를 감싸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서서히 반사의 주문을 포기하게 되었다.
보호막에 감싸진 채로는 이 뜨겁고 차갑고 따끔거리고 보드라운 삶의 질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에, 아픔과 기쁨을 받고, 다치고, 낫고, 또 돌려 주며 사는 것이 고통을 넘어서는 자유일 것이기에.
나는 모라가 자유롭기를 바랐고,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247쪽, 같은 책

 

 

 

  뜨거움과 따끔함도 삶의 일부이고, 그 일부들이 모여 하나의 완전한 삶을 이루겠다.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겠으나, 이들이 모여 경험을 이루고 가치관을 만들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존 듀이는 싫지만, 그의 경험주의 교육사조는 와닿는다. 나의 교육 가치관도 유사하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아야 안다'는 속담을 볼 때마다, 그것 또한 경험이고, 또 배움일 것이라 생각해 왔다. 치열하게 공부해 보는 경험, 그럼에도 시험은 망치는 경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공부할 수 있는 경험들이 모여 청소년 시기를 만들어간다.(우리 학교의 중간고사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럴까.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것 만큼은 절대! 안돼!"가 인 것들이 잘 없다. "그래? 그렇게 하렴."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것들을 인정해 준다. (언뜻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학생들에게는 경험주의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 스스로는 단단하고 깨지지 않을 보호막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그것 또한 배움일 거야. 더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됨을 기뻐하렴."이라고 말하면서도, 나 스스로에게는 '가장 빠른 길, 가장 쉬운, 효율적인 길'만을 찾았다.

 

 

  보호막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걸까. 다치는 것,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두지 않고, 먼저 상처받기를 감당하면서도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겠다. 김혜진 작가님의 『프루스트 클럽』에서 처음 배웠다.

 

 

"보호막이 없거나 얇은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잘 보이게 되지. 그런 상태를 순진하다고 하는 걸 거야. 그런 약점이기도 하지만, 그런 모습이라면 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해 줄 수 있어. 필요한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인 거야. 보호막이 없다는 것은."
195쪽. 김혜진(2005). 『프루스트 클럽』. 바람의 아이들.

 

대학교 선교단체에서 이러한 표현을 배웠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기로 결정하십시오." 이제는 두터운 보호막을 두르는 대신, 따뜻하고 두꺼운 사랑으로 옷 입고 싶다.

 

 

사족.

출처를 알 수 없는 경구 중에 이러한 표현이 있다. "항구에 매여 있는 배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배는 항구에 매어두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보호막은 참 요긴하다. 유용하지만, 그것이 삶의 본질이 될 수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