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침이 될 만한 책을 또다시 찾았다.
이전까지 내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책은 임경선의 '태도에 관하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 김혜진의 '프루스트 클럽',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책이 내 다섯 번째 지침이 될 책이 되었다. 삶의 가치관에 대한 지침이라기보다, 내가 믿는 것들에 대한 지침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논리 따지기를 좋아하고, 당위성 없이는 어떠한 작은 행동도 하지 않는 나에게 이 책은 내 믿음과 세계관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맞아 이거야!' 라는 내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아 감사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지만, 책의 내용과 그것에 대한 나의 주석으로 남은 서평을 채운다.
41쪽.
만일 그렇다면, 술을 안 마셔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불편해야 마땅합니다.
무척 공감한다. 스무 살의 철 없던 내게, '왜 술 안 먹기가 안되지? 나는 되는데 왜 너는 안되니?'라는 판단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던 시기가 물론 내게도 있었다. 사랑 없던 내 20대 초반이었다. 이제는 술 마시는 사람들을 향한 날 선 마음이 이제는 없다. 이제는 내가 '술을 먹지 않아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감사하게도 19년도부터 기독교 학교에만 근무했기에, 이것을 어필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되었다. (사실 이것만으로, 내가 지금의 학교에서 근무하며 누리고 있는 가장 큰 감사함 중에 하나일 테다. 어느 어른들의 공동체에 술이 전혀 없는 문화가 있을까!)
117쪽.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가 본래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존재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인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죄인임을 믿느냐고 물으면 긍정할 성도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자신이 근원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는 과정 없이 단지 구원의 여부에 모든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결국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핵심은 가장 먼저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인 것 같다. 이것이 우리는 잘 안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결국 "너가 이렇게 나쁜 사람이야."를 먼저 깨닫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의 의로움이 이토록 높은 현대 시대에 '너, 사실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고 '그래 맞아... 사실 나는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야.'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존재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학급에서 학급 경건회를 통해 전하고 있다. "우리 모두 속으로는 알고 있어. 우리 서로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그걸 잘 숨기고 사는 것일 뿐이지."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인식하기 시작할 때, 복음은 진정한 빛이 되어 우리를 인도한다.
176쪽.
만일 다양성 중시와 소수 인권을 보장하는 의견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미개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는 여전히 불관용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 기준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체 모순을 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진리란 없으며, 모든 거대 담론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항상 있었는데, 그것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었다.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빠뜨리기 쉬운 함정이겠다.
그리스도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불관용'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겠다.
177쪽.
앞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 자체는 참과 거짓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에 반대하는 비신자들을 공격하거나 배척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싶어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에 대한 포용과 사랑을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자세이겠다. 포용과 사랑. 결국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비난과 폭력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사랑 없음'이 드러나는 여러 죄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겠다.
185쪽.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갔을까요? 우리는 함부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갔을까요? 이 또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정직한 대답은 '주어진 정보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인물뿐 아니라 주변의 이웃이나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확신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중한 문제일 수 있는 타인의 구원 여부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한다면 얼마나 큰 무례일까요? 허락된 만큼 추론하되, 하나님만이 지니고 계신 판결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뜻 보이게는 비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무신론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응 아니야, 세종대왕 천국 못 가~"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가령 돌아가신 할아버지(그리스도인이셨다.)께서 천국에 가셨는지 또한 나는 단정할 수 없다. 지옥에 절대 가지 않으셨을 거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구원 여부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217쪽.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는 과연 진보할 수 있는 존재일까요? 윤리를 수정해 나가면 인간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세련된 제도와 규율이 우리를 잘 억제해 주면 온전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윤리를 수정해도, 세련된 제도와 규율이 만들어져도, 우리는 결국 온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것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이 군대였다.
군대는 무수한 체크리스트가 있다. Red, Yellow, Green 세 가지 표기로 다양한 임무 수행 여부를 판단하는 체크리스트가 있다. 00시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근무자들의 To-Do List와 매뉴얼이 무수히 많다.
방공 진지 속, 상황실 근무자가 읽어야 할 매뉴얼 책자만 10권이 넘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매뉴얼을 읽지도 않고, 대다수의 근무자들은 경계작전을 실시한다. 필요한 일이 생길 때, 해당하는 부분만 매뉴얼을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심각한 근무태도의 사람들은 상황이 생기더라도 매뉴얼대로 하지 않고 임의로 상황조치를 하곤 한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과 매뉴얼이 있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그 시스템 속의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태생적으로, 게으르다.
220쪽.
많은 이들이 구약의 장엄한 기적들보다는 인간 예수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더욱 강력한 신성을 느낍니다.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일은 우리가 시도하거나 욕심을 낼 수조차 없는 신의 영역입니다. 만일 저 멀리 우주의 창조자가 존재한다면, 그 창조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축구를 잘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메시가 왜 그렇게 대단한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서 이토록 강한 경이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일들-가령 약자의 편에 서는 것,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 불의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것, 남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매번 시도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이 일들을 제대로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해 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공평한 게임을 하고 있지만, 비교도 안되게 초라한 결과물을 냅니다. 가끔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부끄러워서 시도조차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면 참으로 신성이 느껴집니다. 예수께서 인간이셨기에, 오히려 인간을 초월했음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위로가 된다. 온 마음을 다해 선한 삶을 살아내고 싶은데, 마음처럼 안된다. 몸은 게으르고, 마음은 악하다. 그렇게 나 자신을 직면할 때마다 죄가 가득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만 된다. (그래서 더 감사가 쌓이게 되는 것도 같지만.)
229쪽.
하지만 거의 모든 경우, 과학이 아래층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탐구방식임이 밝혀졌습니다. '거의'라는 단어를 덧붙인 이유는 유신론자로서 미세한 확률적 예외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예외를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조차 평소에는 자연법칙이 확실하게 작동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일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래층 : 물질적인 세상, 위층 : 형이상학적인 세상)
정확하다. 기적이 기적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움직임이라 칭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여하심이 없어도 세상은 충분히 스스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이 스스로 유지될 수 있음에도,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일어날 때 그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230쪽.
자연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 사조입니다. 즉 자연주의 자체가 위층 소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과학으로는 위층에 있는 것들을 탐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주의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양 있는 과학자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교양 있는 과학자들은"이라는 표현이 너무 웃기면서도, 적절해 보인다. 과학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과학자들을 지칭하겠다. 이것은 마치 불완전성 정리를 지켜보는 수학자들의 마음과 비슷하겠다. 수학의 형식 논리로는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는 슬픈 수학의 현실을 직면하는 것과 비슷하겠다.
231쪽.
그렇다면 과학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면 신을 반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런 질문은 마치 복싱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540도 발차기를 할 수 있게 되느냐는 말처럼 들립니다. 복싱의 룰은 540도가 아니라 1080도 발차기로 다운을 빼앗더라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당 선수에게 실격패를 선언할 뿐입니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학문의 정당한 범위를 벗어난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아주 아주 아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적어주셨다. 영역이 다르다. 물론 신의 논증이 과학이 아니라 철학의 영역인가?라는 질문에는 또다시 회의적이기도 하지만.
235쪽.
가장 확실한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권을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둡니다. 그러나 인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돼지보다 인간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채식주의자들조차 돼지를 도축하는 일과 토막 살인을 동등한 범죄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만일 비교 대상을 돼지에서 모기로 전환해서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럼에도 인권은 마치 수학법칙과 같은 공리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왜 당연하다고 질문하면 황당하다는 반응을 마주할 뿐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처음이다. 증명할 수 없는 관념에 대한 소개가 이토록 직관적일 수가 있구나! 물론 무수한 고민과 토론 끝에 얻어낸 결론이실 테지만, 새삼 변증법의 대단함에 박수를 치게 된다.
239쪽.
그래서 행복 추구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은 의미를 찾게 됩니다. 기부도 하고,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기 위해 노력도 하고, 사람들의 멘토가 되어 동기부여도 하고,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책도 출간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도 결국에는 허망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든 의미든 결국 우리를 온전히 채워줄 수 없습니다.
와. 이것이 내가 책을 읽으며 깨달은, 내 삶을 관통하며, 평생 동안 반추할 주제이겠다. 사람은 결국 죽고, 우리가 남길 유산들은 결국 바스러질 예정이다. 몇억 뷰를 자랑하는 영상들도 1000년 뒤 또 다른 포맷과 하드웨어가 등장했을 때는 재생 불가능한 구닥다리 영상이 될 뿐이다. 책으로 출간된 문장들도 1000년 뒤, 바스러질 종이와 잉크이겠다. (물론, 그 지식들은 꾸준히 전승될 테지만) 그것으로 무언가를 채우려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열심을 다해 책을 읽고, 또 글을 남겼다. 세상에 한상국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죽었음을 이러한 방식으로 남기고 싶었던 꽁꽁 숨겨둔 나의 열망이었다.
240쪽.
괴롭고 허무하나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행복도, 의미도 추구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부조리함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 한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고도란 행복이자 의미이며, 신이자 구원입니다.
결국 내가 추구할 방향성은 이 땅에서 채울 것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겠다.
그 밖에도 기억하고 싶은 부분들을 갈무리했다.
19쪽.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세계관의 변화는 기독교를 믿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믿은 뒤의 결과라는 점을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쪽.
삶이 변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삶이 변하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바입니다.
41쪽.
만일 그렇다면, 술을 안 마셔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불편해야 마땅합니다.
52쪽.
첫째는 자신이 질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중략)
53쪽.
질투 문제를 해결하는 두 번째 방법은, 바라는 가치 체계를 바꾸는 것입니다.
54쪽.
궁극적인 해결책은 욕망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61쪽.
하나님이 전자기력이라는 자연법칙을 사용하여 번개가 치도록 설계하셨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117쪽.
자신을 포함한 인류 전체가 본래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존재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기본적인 전제를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서 살인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죄인임을 믿느냐고 물으면 긍정할 성도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자신이 근원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는 과정 없이 단지 구원의 여부에 모든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143쪽.
솔직히 말해서 감독이 되감기를 하는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감독은 원래부터 그런 것을 하는 존재입니다. / 감독이 정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는 언제일까요? 영화의 내용과 연출이 뛰어날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라는 이야기를 총괄하는 감독은 우리를 감탄하게 할 만한 분입니까?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일 부활이 이 시나리오의 결말이라면, 앞선 죽음이 비참할수록 극적인 시나리오가 될 것입니다. 만일 영생이 결말이라면, 인생이 헛되게 보일수록 더욱 멋진 플롯이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176쪽.
만일 다양성 중시와 소수 인권을 보장하는 의견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미개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는 여전히 불관용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대적 기준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체 모순을 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적 진리란 없으며, 모든 거대 담론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 진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177쪽.
앞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 자체는 참과 거짓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논쟁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에 반대하는 비신자들을 공격하거나 배척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싶어서 기독교라는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은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에 대한 포용과 사랑을 말합니다.
185쪽.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갔을까요? 우리는 함부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에 갔을까요? 이 또한 그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정직한 대답은 '주어진 정보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인물뿐 아니라 주변의 이웃이나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확신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도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 중한 문제일 수 있는 타인의 구원 여부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한다면 얼마나 큰 무례일까요? 허락된 만큼 추론하되, 하나님만이 지니고 계신 판결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5쪽.
우리가 탐욕이 가득한 자들에게 자신만만하게 지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속에도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동성애에만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자신이 결코 동성애자가 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신은 전혀 유혹을 받아 본 적 없는 종류의 죄를 맹렬히 비판하는 일만큼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손쉬운 것도 없습니다. 죄를 지적하기에 앞서 마음속 동기를 제대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215쪽.
그분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원래 약자인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불행한 운명 앞에 놓인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흔히 예수님을 창녀와 세리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창녀는 사랑해도 세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불쌍한 자는 동정해도, 부패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돌을 던집니다. (중략) 그런데 만일 당사자가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부패한 관리였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시며 구해 주셨을 것입니다.
217쪽.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우리는 과연 진보할 수 있는 존재일까요? 윤리를 수정해 나가면 인간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세련된 제도와 규율이 우리를 잘 억제해 주면 온전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220쪽.
많은 이들이 구약의 장엄한 기적들보다는 인간 예수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더욱 강력한 신성을 느낍니다. 홍해를 가르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일은 우리가 시도하거나 욕심을 낼 수조차 없는 신의 영역입니다. 만일 저 멀리 우주의 창조자가 존재한다면, 그 창조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축구를 잘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은 메시가 왜 그렇게 대단한지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서 이토록 강한 경이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신 일들-가령 약자의 편에 서는 것,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 불의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것, 남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매번 시도하는 것들입니다. / 우리들은 이 일들을 제대로 해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해 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공평한 게임을 하고있지만, 비교도 안되게 초라한 결과물을 냅니다. 가끔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부끄러워서 시도조차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면 참으로 신성이 느껴집니다. 예수께서 인간이셨기에, 오히려 인간을 초월했음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229쪽.
하지만 거의 모든 경우, 과학이 아래층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탐구방식임이 밝혀졌습니다. '거의'라는 단어를 덧붙인 이유는 유신론자로서 미세한 확률적 예외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예외를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조차 평소에는 자연법칙이 확실하게 작동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일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30쪽.
자연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 사조입니다. 즉 자연주의 자체가 위층 소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과학으로는 위층에 있는 것들을 탐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주의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교양 있는 과학자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231쪽.
그렇다면 과학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면 신을 반증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런 질문은 마치 복싱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540도 발차기를 할 수 있게 되느냐는 말처럼 들립니다. 복싱의 룰은 540도가 아니라 1080도 발차기로 다운을 빼앗더라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당 선수에게 실격패를 선언할 뿐입니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학문의 정당한 범위를 벗어난 질문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235쪽.
우리는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압니다. 만일 신을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신앙생활이라는 말은 탐구생활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235쪽.
가장 확실한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권을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둡니다. 그러나 인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돼지보다 인간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채식주의자들조차 돼지를 도축하는 일과 토막 살인을 동등한 범죄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만일 비교 대상을 돼지에서 모기로 전환해서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럼에도 인권은 마치 수학법칙과 같은 공리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왜 당연하다고 질문하면 황당하다는 반응을 마주할 뿐입니다.
236쪽.
니체가 보기에, 신을 부인하면서도 기독교적 도덕만 취사선택하려는 태도는 모순입니다.
236쪽.
노터데임 대학 명예교수인 앨빈 플랜팅가는 한 발 더 나아간 주장을 펼칩니다. 그는 타인이 내면세계 곧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논증하며, 그럼에도 모든 사람은 이를 증명 없이도 믿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종류의 믿음을 가리켜 기초적 믿음(basic belief)이라 칭합니다. 기초적 믿음이란 별도의 증거가 없어도 충분히 합리적이라 부를 수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236쪽.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과 철학으로는 신을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음을 살펴보았습니다.
237쪽.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의아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몸 자체가 이 땅에서 궁극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쾌락이든 정신적인 쾌감이든, 결국 인간은 도파민과 세로토닌 등의 호르몬 작용을 통해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데 일정 수준의 행복감을 지속적으로 맛보면, 결국 동일한 수준의 쾌감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양의 호르몬이 필요해집니다.
239쪽.
그래서 행복 추구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은 의미를 찾게 됩니다. 기부도 하고,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기 위해 노력도 하고, 사람들의 멘토가 되어 동기부여도 하고,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책도 출간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도 결국에는 허망합니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때문입니다. 쾌락이든 의미든 결국 우리를 온전히 채워줄 수 없습니다.
240쪽.
괴롭고 허무하나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행복도, 의미도 추구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부조리함을 완전히 극복한 사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 한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결국 고도란 행복이자 의미이며, 신이자 구원입니다.
245쪽.
칸트에 따르면 신의 실재성은 순수 이성을 통해 증명될 수 없지만, 반대로 거부될 수도 없습니다. 그 대신 그는 실천 이성 곧 도덕성의 영역에서 신의 필요성을 요청합니다.
268쪽.
믿음 A는 사실의 참과 거짓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는 외계인을 믿어"라는 말을 하면, 그 말은 곧 "나는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믿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믿음 B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의 신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내 아버지를 믿어"라는 말은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274쪽.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종교적 색채를 빼고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275쪽.
"내가 신을 해도 이보다는 잘하겠다." / 이것이 인간의 교만함입니다. 아마도 아담 또한 선악과를 따서 먹을 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톰라이트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에게 "당신은 신으로서 낙제 점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윽박지르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277쪽.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요구는 분명 비합리적입니다. 백 살에 어렵게 낳은 자식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이게 뭔가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삭이 없으면 어떻게 되지? 하나님은 나와의 약속을 못 지키시지 않나. 그런데 하나님은 무조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데?"
* 신입사원 이야기.
206쪽~223쪽.
처음 죄를 짓게 된 인류 혹은 개개인의 모습은 악독한 살인마나 폭군보다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당황해하는 신입사원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이로 인해 회사와 동료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실수이지만, 상사와 동료들은 그것을 잘못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중략)
물론 신입사원의 첫 실수 또한 분명한 잘못입니다. 모두에게 피해를 주었으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쌍합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죄를 지은 인간은 마치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신입사원이 사장을 피하듯 자발적으로 신을 피하게 됩니다. (중략)
큰 잘못을 저질렀던 신입사원을 다시 소환해 보겠습니다. 그의 잘못이 사장에게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취업 준비만 3년을 했는데 이대로 해고되면 삶이 고단해집니다. 다음 취업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회사가 입은 손실을 그가 배상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원은 이제 상사들이 말을 걸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릴 것입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았더라도, 곧 사람들이 알아차리는 게 시간문제라는 것만큼은 압니다. 자신이 회사에 큰 피해를 입혔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해고당해야 마땅한 사람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순간의 미숙함으로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왠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모든 직원에게 보너스를 준다고 합니다. 잠깐은 기쁠 수 있지만, 다시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면 마음이 내려앉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나갔는데 날씨도 너무 좋고, 평소에 짝사랑하던 동료에게 오늘따라 멋지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은 것도 잠시, 죄와 벌의 문제는 이 사람의 상태를 밑 빠진 독처럼 만듭니다. 이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무엇을 해도 완전한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중략)
이쯤에서 다시 신입사원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결국 잘못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막대한 손실을 입혔는데 불쌍하다는 이유로 봐준다면, 그 회사는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회사를 넘어 정부라고 가정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중략)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평소 회사에서 굉장히 평판이 좋은 베테랑 상사가 있었습니다. 이 상사가 신입사원의 잘못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 사원이 손실을 배상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쌍한 마음이 든 상사는 즉시 회사에 가서 자신의 잘못으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이 일 때문에 상사는 자신의 경력에 손해를 입고, 회사에서의 입지도 좁아졌습니다. 그러나 회사 손실은 보험으로 잘 무마되었고, 결국 신입사원은 책임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 회사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중략)
223쪽.
이번 질문 초반에 예로 들었던 신입사원의 이야기는 팀 켈러가 목회하던 뉴욕의 리디머 교회의 성도에게 있었던 일을 조금 각색한 실화입니다. 실제로 해고를 당할 만큼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던 신입사원은 책임을 면한 반면, 상사는 여러 면에서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무척 놀란 신입사원이 상사에게 묻습니다. "공을 가로채는 상사는 여럿 보았지만, 남의 허물을 대신 지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상사가 대답을 피하지만 신입사원은 재차 묻습니다.
이에 상사가 대답합니다. "이런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계속 물으니 답하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맡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닿는 데까지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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