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활동과 진로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반 아이들이 제출했던 보고서를 한 장씩 읽을 때마다, 아이들의 생각과 마음이 천천히 전해져 온다. 철학교수님의 인문학 특강을 듣고 '성장'과 '성적' 사이에서 어딘가에서 갈등하는 마음이 전해져 오는 아이들의 기록이 참 따뜻하다. 점수보다 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지만, '그래서 성장하면 성적이 올라요? 내가 대학을 잘 갈 수 있나요?' 외치듯 질문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물론 허겁지겁 겨우 필수 내용만 겨우 채워 제출된 보고서도 있고, '선생님이 원하실 법한' 내용들로 가득 채운 보고서도 보인다. (학생들은 이걸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또래 사랑 학습 멘토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내실 있게 멘토링을 했던 친구들의 멘토링 일지를 보며, 이들이 보내었던 2~30시간이 하나씩 그려진다.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기반으로 환경 문제와 기아 문제, 과학기술과 윤리 문제 등 사회 전반에서 발생하는 이슈와 갈등을 보며 인간사회의 다양한 양상들을 통찰해 내는 통찰력을 가졌던 학생의 모습과, 이 통찰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결정해 내는 모습을 보며 내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갓 의사가 된 사람의 첫 마음이 변질되고 마는 내용의 소설을 읽으며 자신 또한 지금의 첫 마음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고 번민하는 의예과 지망생의 독서감상문을 읽고 있노라면 이 학생의 향후 10년을 담임으로 계속 지켜보고 싶어 진다.
2022학년도 2학년 9반 아이들의 행동 특성 종합 의견을 작성하기 전, 2020학년도에 작성했던 자율, 진로, 행동 특성 종합 의견을 읽어보았다. 20401의 학번을 가진 학생부터, 20425라는 학번을 가진 아이들의 얼굴과 표정, 함께했던 일들이 종합의견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다 생각난다. 가족 이름을 쓰라고 했는데, 초코라는 강아지를 쓴 아이부터, 발로란트와 오버워치를 참 잘하던, 방과 후에 시스루 옷차림으로 다시 등교했던 아이까지 하나씩 그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올해 작성했던 2022학년도 아이들의 생기부도 내년에 다시 읽으면 이들의 삶이 생생하게 떠오를테다.
생활기록부를 쓰며 겨울을 보내다 보면, '교수평기'라는 네 글자에 가려지고 '입시'와 '학종'이라는 글자들에 가려져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회의감이 올라오기도 한다. 종합의견을 두고 "담임선생님께서 써주시는 학생의 대학 입학 추천서"라는 표현을 쓰시는 선생님도 계신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들로 교육의 가치가 입시라는 가치로 평가절하되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정말... 다양한 선생님들이 이곳에 모여 계신 것이 확실하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기록부를 쓰던지 생기부를 쓰는 마음에 부담감만 넘칠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작성할 수가 없다. 내가 담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공개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대충 쓸 수는 없다.
방학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방학 숙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생들에게는 윈터스쿨 / 썸머스쿨로 표현되는 학원의 겨울 방학 특강이겠다.) 학생들을 포함하여, 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방학마다 숙제가 주어진다. 짧은 여름방학에는 1학기 집중 이수제로 이수되는 교과목의 '교과목별 세부 특기 사항' 1500바이트를 작성하는 것이라 상당히 짧고 또 편한 반면, 겨울방학에는 1년 동안 진행되는 교과목의 세특, 동아리 지도교사가 작성해야 하는 '동아리 활동 세부 특기 사항', 그리고 담임 선생님들께서 작성해주셔야 하는 '자율 활동 세부 특기 사항', '진로 활동 세부 특기 사항', '행동 특성 종합 의견'을 완성해야 한다. 나는 1학기 수학I(3학급), 2학기 기하(3학급), 1년 수학II(2학급) 수업을 맡았고, 21명의 창체 동아리활동, 그리고 21명의 담임 학급이 있었으니, 생활기록부에 써야 하는 모든 항목을 전부 작성해야했다.
'방학 전에 미리 해둬야지!'라는 마음으로 교과목과 동아리활동 특기 사항은 방학 전에 얼추 마무리가 되었으나, 담임 학급 아이들의 생기부는 결국 방학 이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방과후 학교(튜터링)로 출근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생활기록부만 붙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2월 17일, 금요일에야 초안을 마칠 수 있었다.
2020학년도에 비해 2주나 더 일찍 마쳤다. 그리고 이제 내일이면 2023학년도 2학년 11반 학생들을 만난다.
22학년도의 별들을 보내고, 23학년도의 꽃을 기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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