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클라인(1953). 박영훈 옮김(2004).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경문사. 2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산출해내는 결론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추론 방법이 존재한다. 연역법이라는 추론 방법이 그것이다. (중략) 추론과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가 그 전제에 동의하는가 하지않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만일 우리가 그 전제들을 받아들인다면, 그 결론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추론의 타당성을,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나 그 결론의 진리성과 혼동한다. 47쪽.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연역적 추론이 경험, 귀납법, 또는 유추에 의한 추론보다 우수한 것은 아니다. 전제들이 100퍼센트 옳다는 것이 보장될 때에만 연역에 의한 결론도 100퍼센트 확실하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의심할 수 없는 전제들이 항상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48쪽.
물리적 생명, 건강, 학문, 문학, 철학을 영혼의 구원과 비교해볼 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중략) 현세에서의 삶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하찮은 서곡에 불과한데, 그 삶을 왜 유쾌하고 안락하게 하려고 하는가? 신의 본성과 인간 영혼과 신과의 관계에 관하여 아직 탐구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 많은데, 자연 현상에 대한 질문에 답하려고 애쓰는가? 135쪽.
그리하여 후기 중세 학자들, 특히 스콜라 학파으학자들은 그내 수학과 과학이 태어날 수 있는 합리적 분위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르네상스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자연이란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하느님의 방식은 이해될 수 있다라는 믿음을 불어넣어주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근본적 교리였다. 코페르니쿠스,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이, 호이겐스, 뉴턴이 인내심을 가지고 지치지 않고, 열심히 어려운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들이 성서를 버리고 자신의 대전제로는 유클리드로, 그리고 자신들의 순수하게 과학적인 자료로는 자연에 대한 관찰로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경이로운 설계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기독교의 정통 옹호자였으며 신실한 신자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들의 연구가 기독교 교리와 충돌되는 법칙을 만들어내고, 궁극적으로 이 연구들이 사상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침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141-142쪽.
이들 법칙에는 수학의 힘을 이해하고자 하는 보통 독자들에게 좀더 도움이 될 만한 중요한 추론이 있다. 뉴턴 법칙의 주요한 가치는 우리가 방금 본 것처럼, 그것들이 천체와 지구상의 너무나 많은 다양한 상화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 동일한 양적 관계들은 모든 것에 공통적인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 공식들에 대한 지식은 실지로 그 공식이 포괄하는 모든 상황에 대한 지식을 대표하고 있다. 수학 공식을 보고서 그 추상성과 건조함, 그리고 쓸모 없음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진짜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90쪽.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총괄적인 수학 법칙 체계로 외관상 엄청나게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을 넘어서는 것이다. 모래 알갱이와 가장 무거운 별들의 움직임은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하여 설명되고 예측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와 태양 빛은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에 의하여 기술되고 설명될 수 있다. 전류, 자기 효과, 라디오 전파, 적외선, 빛 파동, 자외선, X선, 그리고 감마선, 초당 60번의 낮은 주파를 가진 사인곡선 모양의 파동과 1 다음에 0이 24개 등장하는 수량의 높은 주파를 가진 파동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리 수학적 구조의 표현일 뿐이다. 이 이론은 너무나 심오하면서 동시에 너무나 포괄적이어서 상상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이며, 자연 속의 계획과 질서를 인간에게 더욱더 호소력있게 드러내보였다. 이 법칙으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이자 자신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유일한 기반인 인간의 이성은 또 다른 승리를 보장받았던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인간은 날뛰는 자연을 다스리는 고삐를 정신의 힘으로 쥘 수 있게 되었다. 439쪽.
이전에 수학은 현상에 대한 기계학적 분석을 표현하고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수학적 설명은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사실 기계학적 설명은 아주 제한된 영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폐기되었다. 어떤 현대 물리 이론의 핵심도 모두 일단의 수학 방정식이다. 그리하여 뉴턴 시대에 물리학적 사고의 하인이었던 미분방정식은 이제 그 주인이 된 것이다. 맥스웰의 연구가 기계학적인 자연철학을 전복하였지만, 그것은 또한 기계학적 견해와 함께 성장하였던 결정론적 철학을 강화시켰다. 19세기 과학자들이 보기에 맥스웰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 등이 시작한 프로젝트의 최고 성취였다. 그렇게 광대한 숫자의 새로운 현상들이 이제는 정확한 수학법칙으로 수렴되면서 우주의 수학적 설계라는 아이디어는 거의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보다 더 건방진 과학자 집단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감에 가득 차서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했던 18세기 과학자들이 세운 모든 목적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은 19세기 계승자들의 자랑이었다. 444쪽.
'하느님의 자연'이라는 표현 역시 중요하다. 물론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후원은 많은 다양한 대의(cause)와 심지어 반대하는 대의가 자주 사용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의 원리는 계시를 통하여, 성서를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진 신의 원리가 아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통하여 말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성은 그의 의지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부인 이성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실 18세기 사상가들은 실질적으로 '올바른 이성'과 자연을 동일시하였다. 456쪽.
그리하여 18세기에는 불변의 수학 법칙에 따라 엄격하게 결정되고 설계된 것으로 보았던 바로 그 똑같은 세계가, 이제는 혼란스럽고 법칙이 없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했다. 실재는 전체적으로 목적이 없는 듯이 보였고, '아무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는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한 바보가 말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인간은 이제 맹목적이고 우연적인 과정의 우발적인 사고만 할 뿐이다. 과학의 수학적 법칙은 이제 단지 무질서한 일들의 평균적 결과를 이용가능하고 편리하게 요약한 것 이상이 아니다. 자연과 그 법칙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연이 혼돈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 법칙이란 평균 결과의 편의적이고 순간적인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자연에 대한 통계적 관점이다. 이러한 통계적 관점과 결정론적 견해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과학 법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이 사실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완전히 다르다. 결정론은 과학 법칙이 자연적 대상의 필연적이고 불변하며, 보편적인 행동에 대한 진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계적 관점에서는 법칙이 단지 고도의 확률을 지닌 진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정론자들은 지구와 태양이 케플러의 법칙에서 관계를 맺고 있듯이, 법칙에 의하여 관계를 맺은 대상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통계이론가들에게 법칙이란, 내가 갈색 넥타이를 맸을 때 동시에 이웃의 어떤 사람이 시가를 피울 수 있듯이 단지 일시적 상황을 관찰한 것에 불과하다. 결정론은 자연의 현재 상태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내가 공중으로 공을 던지면, 그것은 반드시 포물선을 그리며 바로 지구로 다시 떨어져야만 한다. 반면, 통계적 관점은 어떤 경우에는 포물선의 법칙에 따라 떨어질 수도 있지만, 직접 태양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한두 가지 예만 더 들어도 두 관점 간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가령, 방망이로 공을 쳤다고 치자. 결정론적 관점에서는 방망이가 공과 접촉할 때에 작용하는 힘은 수학적인 운동 법칙에 따라 미리 예정되고 기술된, 명확한 비행 패턴을 따라 공이 날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몇 가지 수량적 사실들이 주어지면 공의 운동은 더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다. 통계적 관점에 따르면, 방망이 속의 수십억 개의 분자들이 공 속의 수십억 개의 분자들과 가까워지면, 무작위적인 운동을 통하여 상대 집단의 많은 분자들과 부딪쳐서 그들에게 속력을 부여하게 된다. 공 속의 너무 많은 분자들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공 자체는 대부분의 분자들이 방망이의 분자들과 접촉하면서 움직인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 공이 예상된 방향으로 움직일 확률은 너무나 커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 적어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건초 더미 속에서 바늘을 찾을 확률은 정말 적긴 하지만 그 속에 바늘이 있기는 있는 것이다. 528-529쪽.
자연에 대한 관점으로 결정론이 옳은가, 통계적 관점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설계되고 질서정연한 우주에서 삶은 의미와 목적이 있다. 이러한 설계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면, 인간은 살아가고 건설할 용기와 이유를 갖게 된다. 또한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도 강화시킨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합리적 주장이 바로 설계된 우주에 기초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고하는 초인간적인 신, 혹은 웅대한 설계자가 수학적으로 설계된 자연 세계의 거의 필연적인 선행자가 되는 것이다. 거꾸로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광범위한 영역의 종교와 윤리에 내용이 생기게 된다. 반면, 자연에 대한 통계적 관점이 옳다면, 물리적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역할은 비합리적인 것이 된다. 명백히 사건들은 아무런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단지 우연적이며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체 우주는 어떤 우주적 대변동에 의하여 내일이라도 파괴될 수 있다. 삶은 순간의 의미 없는 쾌락과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530-531쪽.
"(전략) 케플러가 더 간단한 곡선을 선택하고, 이 곡선과 달리 나온 자료를 측정상의 실수로 보는 것이 옳았던 것일까요? 명백히 우리는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측정도 정확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불확실성은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것이지요. 과학 법칙의 단순성에 기반하여 설계를 주장하는 것이 결국 이 한마디로 환원할 수 있을 겁니다. 측정상의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오차 범위 내에서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많은 공식 중에서, 인간은 가장 단순한 것을 선택한다고. 이렇게 보면, 단순성이라는 주장은 자연의 상태보다는 인간의 마음이 선호하는 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534-535쪽.
볼리아이와 로바체프스키의 연구가 가지는 두 번째 함의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대안도 모순을 생성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유클리드 평행 공리의 진리성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수학자들이 평행 공리들의 진리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두 가지 계획 모두가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하학의 가장 중대한 의미는 완전히 예상밖의 것이었다. 논리 실습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른거리는 결론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다른 기하학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570쪽.
그렇다면, 기하학이란 것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진 측정에서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클리드 기하학이 제일 먼저 발달하였을까? (중략) 이러한 역사는 인간이 신체적 관습, 사회적 관습과 인습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사고의 습관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583-584쪽.
일반적인 사상사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마찬가지로, 뉴턴의 만유인력과 다윈의 진화이론, 그리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급진적으로 과학과 철학,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 이보다 더 획기적인 사건이 일찍이 사상사에 발생한 적이 없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첫 번째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탄생하면서 언제나 함의되어 있었지만, 한번도 인정되지 않았던 구별, 즉 수학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 사이의 구별을 명백하게 하였다. 둘을 동일시한 것은 원래 오해 때문이었다. 우리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것, 시각과 촉감이라는 감각 때문에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이 물리적 공간에 적용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584쪽.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창조로 해서 진리라는 영역은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되었다. 고대 사회의 종교와 같이, 서구적 사고에서 수학은 존엄하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학이라는 사원에서 모든 진리가 휴식을 취하였고, 그 중 유클리드는 가장 고귀한 사제였다. 그러나 볼리아이, 로바체프스키, 리만이라는 세 사람의 불경한 연구가 의식과 고귀한 사제, 그리고 그 모든 참석자들에게서 신성한 구속력을 빼앗아버렸다. 그 연구를 떠맡으면서도 이들 세 명의 대담한 지성들은 단지 새로운 평행선 공리의 귀결을 탐구해야 한다는 논리적 문제만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처음부터 진리 자체에 도전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틀림없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가 단지 재기발랄한 수학적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아무런 심각한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타당한 표현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 그 순간,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생겨났다. 어떻게 수학이, 항상 양과 공간에 대한 진리를 제시해준다고 장담하였던 수학이 이제 몇 개나 되는 모순된 기하학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이들 중 하나만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은 아마도 진리가 이 모든 기하학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기하학의 창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수학적 공리에 대해서도 '만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만일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들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진리라면, 그 정리들도 그러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선험적 근거에 기반하여 유클리드의 공리들이, 또는 어떤 다른 기하학의 공리들도 진리라는 것을 결정할 수 없다. 586쪽.
진리가 신성함을 잃게 되면서 이제 수학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한 오랜 의문이 해결되는 것 같다. 수학은 산과 바다가 그렇듯이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인간의 창조물인가? 다시 말하여 수학자들은 수세기 동안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던 다이아몬드를 파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조석을 제조하고 있는 것인가? 19세기 후반만 하더라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두고서, 유명한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이들 수학적 공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보다 더 지혜롭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운 자신만의 지능을 소유하여 우리가 무언가를 덧붙여 만들어냈다기보다는 그것 자체가 더 많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수학은 이제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영원한 실체라기보다는 실수할 수도 있는 인간 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학은 객관석 실재라는 근본에 근거한 강철 구조가 아니라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거미집과 같은 것이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창조되면서 그것이 수학을 진리의 기초 위에서 무례하게 밀어낸 거싱라면, 한편으로 그것은 수학이 자유로이 방황하도록 풀어준 것이기도 하다. 로바체프스키와 리만, 볼리아이의 연구는 사실상 수학자들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마음대로 방황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을 준 것이다. 588쪽.
수학의 역사에서 이 단계에 이르러 수학은 자신의 발에 묻은 진흙더미를 닦아내고, 과학과 결별하게 된다. 마치 과학이 철학과, 철학이 종교와, 종교가 애니미즘과 마술로부터 결별하였던 거섳럼 말이다. 이제 칸토어에게 '수학의 본질은 자유다'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588-589쪽.
모든 공간이 유클리드적이라는 가정, 절대 길이, 절대 시간, 절대 법칙이 존재한다는 가정, 만유인력이 전 우주에 작용한다는 가정, 고정된 에테르가 존재하며 빛을 운반한다는 가정들은, 이들 가정이 연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문제만큼이나 그 자체로도 너무나 많고, 중요해서 과학이 쉽게 떠안고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동시성, 시간, 길이가 유일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자, 단순히 잡동사니를 모아서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한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그 민중들의 기본적 욕구를 해결해주지 못할 때에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듯, 물리 이론에서의 혁명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599쪽.
상대성 이론이 도입한 이상한 원리들을 살펴보고, 그것의 수학적 세계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깨닫게 된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냥 에테르, 만유인력, 그리고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감각을 만족시켜주는 뉴턴의 세계 속에 내가 머물도록 내버려두시오. 당신의 복잡한 구성물이 다소 실험과 정밀한 추론에는 잘 맞을지는 몰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설명이오.'라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이러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상대성 이론의 두 가지 예측은 과학에서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609-610쪽.
심지어 기하학적 추론의 단계들이 모두 감각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수학과 과학에서 2천 년간의 성과를 모두 빼앗는 셈이 될 것이다. 611쪽.
불행하게도 20세기 과학의 과정은, 점점 더 '상식'과, 직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개념들, 그리고 간단하고도 물리적인 그림과는 멀어져가고 있다. 과학은 점점 더 복잡한 수학에 의존하게 되었다. 수학적 설명은 원자 폭탄을 설계하고 만들 만큼 충분히 실재적이지만, 그 수학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은 불완전하거나 불일치한다. 그러므로 간단히 살펴본다고 해도 양자 현상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제 반밖에 지나지 않은 20세기의 주요한 발전 중 두 번째 것을 그저 언급만 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6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