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2013). 『당신으로 충분하다』. 서울 : 푸른 숲.
『당신이 옳다』를 읽은 이후, 같은 저자의 책을 찾아 읽었다. 4명의 내담자와의 집단 상담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짚어내게 한다. 익명인 내담자들이어서 그랬을까? 그들의 삶을 들으며 온전히 공감하기도 어렵고, 그들의 슬픔에 함께 머무는 것도 어려웠다. '아 이토록이나 내가 사랑이 없구나.'를 내내 느끼며 책을 읽었다. 여전히 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마음이 흐르나 보다.
20년 전 미 해병 수색대대원의 삶을 보며(Evan wright. (2008). 『Generation Kill』.) 1인당 GDP가 높은 것과 안정된 정서를 갖게 되는 것은 독립적임을 배웠다. 오히려 GDP가 높을수록 정서는 양극단의 값을 갖는다는 것을 미국인의 삶을 통해 보았다. 그러면서 읽게 된 책 속의 내용은 교직에서의 나의 태도를 고민해보게 한다.
어린 시절의 학대처럼 극단적인 경우만 여기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 엄마 아빠가 심각한 갈등이 있을 때 태어나고 자랐다면, 아빠가 해고당해 어려울 때 태어나고 자랐다면, 엄마가 고부간의 갈등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나 엄마의 일이 극심한 감정 노동인데도 주위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키워야 했다면, 부모가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어른이었다면, 그런 상황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가 경험하는 `사랑과 보살핌의 결핍`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불완전성을 고려한다면 직간접적으로 이런 환경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부모의 일상적 조건 속에서도 아이에게 치명적인 결핍이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가 이런 결핍의 징후를 보일 때 부모 입장에서 그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했다고 이러느냐' 하며 답답하고 억울해할 수 있다.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자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부모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왜 못나게 이럴까, 내가 문제야' 하고 스스로를 탓한다.
(232쪽, 정혜신. 『당신으로 충분하다』.)
평범한 부모의 일상적 조건 속에서도 아이에게 치명적인 결핍이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나 또한 그러하였고, 아내 또한 그러하였으며, 우리 모두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불안정한 정서를 가진 학생들에게 더욱 집중하였던 것 같다. 언제 어디서든 치명적인 결핍이 발견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누구와의 이야기이든 그들의 삶을 더욱 집중해서 들어야 하겠다.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각과 인정 이후에 따라오는 것은 '우울'이다. 오랫동안 갈망하던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면 맥이 풀리고 무력감이 들고 우울해진다. 당연하다. 이때의 우울은 치유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때의 우울은 환영할 만한 과정이다. 성찰과 치유의 과정을 제대로 밟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 무기력해지고 멍해지는 자신을 보면서 '내가 뭐 잘못된 거 아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자신의 상태에 잘못된 해석을 하게 되면 문제가 더 꼬인다. 이때 '마음껏' 우울할 수 있어야 한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대로 허용하는 과정이니 당연히 우울하다.
(중략)
마음껏 우울하고 마음껏 무력해도 된다. 충분히 그러고 나면 간절했던 그 욕구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갖게 된다.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고 나면 그 욕망과 욕구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게 된다.
(156쪽, 같은 책)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찾아오는 우울은 당연하겠다.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무력하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마음 상태인 듯하다. 용산에서의 근무지 아이들의 졸업과 진학 소식을 들으며 행복한 소식과 슬픈 소식을 함께 들었다. 12년간 애썼음에도 할 수 있는 결정이 '한 번 더' 뿐이라면 그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30년을 한 학교에 있겠지 싶었던 나였는데 또 이사하게 되었다. 2022학년도 중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계획하던 나에게 갑작스러운 법인 내 교류가 건네준 무력감은 12월을 가득 채웠었다.
집단 상담을 통한 치유적 요소 중 첫 번째는 보편성(universalization)이다. 쉽게 말하면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중략) 그런데 집단 상담에서 발견하게 되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은 자신에 대한 안도감을 갖게 한다. '그래도 괜찮은 거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만 이상하게 동떨어진 인간이 아니었구나' 하며 안심한다. 그 느낌은 사람에게 치유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치유적인 깨달음이다.
(128쪽, 같은 책)
책을 읽는 내내, 보편성(universalization)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당장 정신의학적 진단이 필요한 4명이 모인 집단 상담이 아니었다. 회사를 경영하거나, 더 좋은 회사로의 성공적인 이직을 거쳤거나, 희망 직업 순위권에 빠진 적 없는 중고등학교 교사가 직업인 커리어우먼(전문직 여성) 4명이 내담자로 모였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가장 '잘나가는' 여성 4명이다. 그런 그들 안에도 여전히 마음의 문제가 있으며 결국 거의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영역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듯하다. 모두가 같은 마음 상황을 가졌으니, 상대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마음을 갖기 이전에 상대와 함께 배워가는 마음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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