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서평

죽음이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와 무게들

꿈잣는이 2025. 1. 20. 19:05

최지월(2014). 『상실의 시간들』. 한겨레출판.

 

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품이다. 교회학교 학생의 추천으로 읽었다. 소설 읽기를 다른 분야의 책 보다 즐기지는 않았기에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펼쳐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나흘 만에 책을 다 읽었다. 문학상 수상작이기에 저자의 다른 책은 없다. 문학상 수상작다운, 저자의 삶의 양식이 많이 드러나는 글 같다.(저자의 삶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책 후반부,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쓰기 시작한 글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책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투영되셨을까. 그 죽음을 직면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상실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나와 달리 아내는 주변에서 참 많은 소천을 경험하였는데, 나는 경험이 없다. 죽음을 경험한 적도 없지만, 아픈 가족들과 함께한 경험도, 노쇠한 부모님을 봉양하는 경험도 없다. 아픈 가족들을 가까이에 두고 병원에서 요청하는 다양한 의사결정들을 촌각을 다투며 내려야 하고 서명을 하고 무작정 검사와 시술과 처치를 기다려본 경험이 없다. '만약 나의 부모님이~/아내의 부모님이~/아내가~/아이가~'라는 전제를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 떠올랐다. 그렇게 내 삶에 소설이 깊이 들어오는 것이 힘들어, 소설책을 손에 잘 잡지 않게 되는 듯도 하다.

 

우리 모두 호상을 꿈꾼다. 건강히 오래 살다가 짧게 아파 길지 않은 병원 생활로 빠르게 생을 마감하는 것. 하지만 삶의 시작을 우리가 정할 수 없었듯, 삶의 끝도 그러하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의 삶의 끝을 내가 정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내 삶의 끝 또한 나 스스로가 정하고 싶기도 하다. 우선은 아내보다 1일 더 먼저 사는 삶을 꿈꿔본다. 한 날 한 시에 같이 삶을 마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큰 사고가 아니면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없으니... 사고를 기대하는 건 절대 아니다.) 이제는 자녀가 있으니, 자녀가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된 이후가 되기를 또 꿈꾸어본다.

 


 

그렇게 문학은, 특별히 소설은 경험해보지 못한 우주를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귀하다.

 

책 초반부, 33년을 직업군인으로 살아오신 화자의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고, 그와 가정을 헌신적으로 섬기셨던 떠나보낸 어머니의 삶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그들의 삶이 이해가 되고, 그들의 삶이 가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충분한 교육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국가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고 살아낸 아버지와 가정을 위해 삶의 전부를 투자한 어머니의 삶이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셨다. 그렇게 누군가가 보기에 '보통의 삶'을 살아갔던 두 분의 삶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만이라도 전쟁 같은 매일의 일과를 치러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부분만 보면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을 조금씩 엿보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이 하나씩 공감되고, 그 삶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 내게는 뜻깊다.

 

화자(석희)의 중고등학생 6년간 만나는 담임 선생님들과 학교에서의 모습이 소설에서 어떠한 필요가 있었을까 계속 고심했다. (저자는 어떠한 이유에서 그 글을 넣었을까, 그리고 편집장은 어떠한 이유에서 그 글을 넣기로 정했을까 계속 의문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고향과 고등학생의 이야기, 어머니의 어릴 적 이야기들이 어떠한 필요가 있어서 이 소설에 등장했을까 계속 고심했다. 한 마디의 정답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들의 조각들이 모여 어머니를 만들고, 또 아버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글자와 책이 아니라 삶으로 경험한 어른들의 삶이 구성하였을 것이다. 지금 나의 부모님 세대도 비슷하게, 우리나라의 6,70년대 이후의 근현대사를 삶으로 경험한 삶이실 테다.

 

그렇게 한 사람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일은 참 귀하다.

그렇게 하나의 우주를 또 경험하고, 그렇게 그 우주를 바라보며 탄복한다.

 


 

해마다 약 25명 남짓한 학생들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들에게 12명의 서로 다른 담임 중 한 번이 내가 된다. 그들에게도 평생의 시간 중 1년의 시간이고, 나에게도 평생의 시간들 중 고작 1년만 이들과 함께 관계할 수 있다. 이 짧은 시간,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학업과 입시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고, 더 나은 대학 진학을 위한 시간으로 그 시간들이 채워진다. 나는 이제 나의 가정을 살피고, 아이를 돌보기 위한 시간으로 내 24시간이 채워진다. 주어진 학교에서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하나가 개별적 우주를 이루고 있는 학생들을 살피며, 또 경탄할 수 있을까.

 

내가 매해 만나는 서로 다른 25개의 우주를 아는 것도 힘들지만, 그들에게 나라는 우주를 얼마나 공개하고, 또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이것도 무척 큰 숙제다. (사실 고등학생들 중 대부분은 자기의 담임교사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또 관계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적은 영향과 적은 관계. 그렇게 짧게 1년을 마치고 떼어버리려고 애쓴다.)

 

학번, 출신 중학교, 내신등급 평균, 주요 과목 성적표, 생활기록부 등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300여 페이지의 긴 이야기로도 석희, 석희의 부모님의 일부만 제한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자서전으로 남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또 한 번 확인한다. 그렇게 나도 내 이야기를 글로 남겨가고 싶은 마음이다. 구체적인 방법과 방향은 천천히 또 고민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