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서평

보이는 책장과 서재 대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지혜

꿈잣는이 2025. 2. 22. 23:54

요한 크라우네스. 이상희(2024). 『사소한 불행에 인생을 내어주지 마라』. 추수밭.

 


내가 처음 만난 스토아 철학은 어느 예배시간에 잠깐 주석으로 소개받았던 내용이 전부였다. 진리와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로부터 시작된 철학이 중세시대까지 그 학문의 태도가 이어졌고, 스토아 철학의 토대 위에 신학들이 세워졌다고 들었다. (5년도 더 된 예배 어딘가에서 들었던, 구체적인 참고문헌이 없는 예시 중 하나였기에 오류가 클 확률이 높음을 명시한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기만 하였던, 너무나 오래된 철학으로만 치부하였던 갈래의 철학을 짧게 나눈 책이었기에, 편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첫 1월에 서로 다른 네 가지 삶의 덕목을 다룬다. 용기, 절제, 정의, 지혜를 순차적으로 다루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지혜가 와닿았다. 다이아몬드. 혹은 황금. 혹은 화폐처럼. 없어질 것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인 내면의 지혜에 집중하고 싶다.

 

나는 늘, 서재를 갖고 싶어했다. 서재를 갖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로, 나는 책을 쌓아둘 곳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인천에 이사오며, 원룸이던 집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3x5 책장을 무려 세 개나 두었다. (하나씩 책장을 늘릴 때, 아내의 표정이 여전히 선명히 기억난다.^^) 호기롭게 책장을 먼저 구비하였지만, 그곳에 꽂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아무 책들로 내 책장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맘에 쏙 드는 책을 꽂고 싶어, 결국 책을 계속 빌려만 읽게 되었다. 빌려 읽으며 책의 내용들을 머리에 넣고, 또 와닿는 글귀를 저장해 두면서 문득, 책을 '소장'하는 것이 갖는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책의 문장을 갈무리하고, 책 내용 전체를 보관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필요할 때마다 그 문장을 찾아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에는 참 유용하기도 할 듯하다. 그런데 이미 이곳 블로그에 무수한 책의 무수한 문장들을 저장해두고 있는데, 자주 꺼내 읽는 문장은 몇 없다. 그저 내가 책을 읽으며, 책마다 적어도 한 가지의 사소한 지혜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게 내면의 지혜가 쌓이며 내가 두꺼워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집 근처에 도보 20분 거리에 큰 도서관 하나, 도보 10분 거리에 조금 작지만 충분한 크기의 도서관 하나가 있다. 이곳 두 도서관이 서재면 충분하지 않을까? 학교의 2월은 인사이동의 계절이다. 4층의 선생님들 중 다섯 분이 자리를 떠나시고, 여섯 분이 새로 오시게 되었다. 자리를 옮기시며 사물함과 교무실 자리 밑의 짐을 빼어 나르시는 선생님들을 뵈며 여러 마음들이 들었다. 1년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짐들을 이참에 정리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나도 비슷했다. 1년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물품들이 사물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06년생 친구들을 졸업하며, 2년간 쌓아둔 수행평가와 활동지를 쌓아보니 세로로 1m가 넘기도 했다.

 

스토아 철학에서 자족과 감사를 중요시한다. 개신교에서의 가르침도 이와 비슷하다. 이미 받은 것들로 감사하며 자족하는 삶을 그리스도교에서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다.

 


 

세 가지 절제의 체가 참 인상적이다. 말을 꺼내기 전, 세 가지 체를 통과할 수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것을 스토아 철학은 말한다. 그 세 가지 체는 '진리의 체', '선의 체', '필요의 체' 옳은 것, 그리고 그 의도가 선한 것, 그리고 듣는 이로 하여금 필요한 것. 이 세 가지 내용이 모두 충족된 것들만 절제하여 말할 것을 스토아 철학은 소개한다.

 

하지만 세 가지 체를 모두 통과한 말이 정말로 유익한지 의문이 남기도 했다. (독서 토론 시간에 좋은 결론을 얻어, 이곳에 소개한다.) '선의 체'는 반드시 상대방 입장에서 선한 의도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공부를 적게 해서 시험을 망친 친구에게, '네가 시험공부를 적게 해서 시험을 망쳤으니, 다음 시험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보자.'라는 말은 절제의 세 가지 체를 모두 가뿐히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옳은 말이었으며, 그 친구에게 필요한 말이고,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옳은 말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그 옳은 말은 전하지 않아도, 대상이 이미 그 정보를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99%이다.)

 

독서 모임에서 한 구성원이 이렇게 '선의 체'를 설명해주었다. 선한 의도를 정할 때, 말하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 '네가 시험공부를 적게 해서 그 결과를 맞았으니, 다음 시험은 열심히 공부해.'라는 말이 선하지 않다면, 그 말은 선의 체를 통과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울 수 없다” 
위의 책, 70쪽. 재인용.

 

이미 선행학습을 마치고 온 학생들을 앞에 두고 수업을 할 때마다, 들었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문장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더 이상 배울 수 없다. 물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지만, 저 사람은 과연 어떻게 다시 설명할까?' 하는 태도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또 다른 배움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렇게 사소하고 작은 지식들도 겸손한 자세로 새로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은 무척 중요하겠다.

 

점차 교육 경력이 쌓인다. 18년 가을부터 교단에 섰으니, 이미 교직에 선 지 6년이 넘게 지났다. 어디 나가서 '저경력교사'라고 말할 수 없을 경력이 벌써 생겼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태도로 학교를 다니다가도, 몇몇 선생님들, 혹은 어떤 교실 상황들을 보며 '오? 이건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몇 년 전 내가 경험했던 어떤 것들이 지금의 그 상황에 똑같이 적용될 수 없음을 머리로 알면서도, 그것이 마음으로는 온전히 와닿지 않는 듯하다. 올해 만나는 학생들은 또 다른 전혀 새로운 우주임을 잊지 말자.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오해와 불통(通)은 시작될 테니까.

 


 

항상 의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세계관에 대해 통찰력있는 삶의 지침을 추구하는 나에게, '생각'은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편이다. 언제나 타인에게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를 묻는 편이다. 그런데 책에서는 항상 의견을 가질 필요는 없음을 제시한다. 책을 읽다 보니 고개가 끄덕거린다. 모든 주제에 대해 생각을 갖기 어렵다. 가령 내게는 해외 축구에 대한 의견이 전혀 없다. 해외 축구를 비롯해, 어떤 스포츠도(최근에 종료된 아시안게임도, 작년에 진행되었던 올림픽도!) 이것에 대해 나는 무지함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영화를 보아도, 음악을 들어도 항상 나의 생각과 반응을 가지려고 애써왔다. 이제는 조금 자유롭게 마음을 내버려 두어도 좋을 듯하다. 대신, 생각을 가져야 할 영역에서만큼은 깊이 있는 의견을 갖고 싶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에 대해서 참 많은 책들에서 조언한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조언이 내게는 조심스럽다. 매일 더 자고 싶고, 더 눕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 않을까? 책을 읽고 생각하기보다는, 숏폼 영상들을 넘기는 삶이 더 편하고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두뇌는 점차 일하지 않는 그 상황에 익숙해져 갈 것이고, 그렇게 뇌의 역량은 약해질 것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희망 직업 1순위가 '건물주'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들을 주로 듣는다. 하지만 그것이 학생들만의 마음일까?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 Retire Early), 파이어운동이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표현이 된 것만 보아도, 우리 모두의 관심이 '돈 많은 백수'임을 반증하는 것일 테다.

 


 

"네게 주어진 의무를 행할 때는 사람들이 너를 비방하든 칭찬하든 개의치 말라."
위의 책, 161쪽. 재인용.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할 때에는 타인이 나를 칭찬하든 비방하든 개의치 않을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때, 나에게 전해오는 칭찬, 혹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몸을 숨긴 '비난')들에 집중할 이유가 없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뿐일 것이다. 그렇게 내가 그 의무를 행하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자유를 얻게 된다. (의무를 행하고 있는 것이 진정 자유인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100%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가 있을 수 없음을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에서 나는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다. 내 학급 경영 방법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까 매 순간 고민한다. (물론 고민만 하고, 내가 계획했던 활동들을 결국 해버리는 편이다. 동료 교사가 어떻게 반응하든지 개의치 않는 편이기도 했다.) 담임교사가 학급을 경영하는 것은 권리, 또는 권한이 아니라 의무일 것이다. 창의적 체험활동의 자율활동, 봉사활동은 각 학급의 담임교사가 그 시간을 책임져야 한다. 의무를 다하는 동안, 타인이 내게 내리는 평가는 마음에 두지 않아도 되겠다. 이렇게 나는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겠다.

 


 

스토어 철학은, 마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듯하다.(확정적인 문투를 사용할 수 없는 건, 아래의 표현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진정으로 의지가 자유로워지려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즉 (궁극적 행복을 의미하는) 예정된 운명의 실현까지 원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책, 206쪽.

 

하지만 동시에, 따라가야 할 운명의 끝을 (삶을 마치기 직전까지도!) 알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우리는 운명을 따라가야 하지만 운명의 카드를 들여다볼 수는 없다. 마치 밤중에 차를 몰고 깜깜한 시골길을 달리는 상황과도 같다. 운전석에 앉은 우리는 전조등이 밝혀주는 만큼만 전방의 길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주행거리는 점점 쌓여간다. 그러므로 장차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삶의 행로에 대해 미리 해석하려 하지 말자."
같은 책, 216쪽.

 

책을 읽으며, 이 부분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 말하는 카이로스, 그리고 예정론도 비슷한 맥락이다. (무척 닮아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특히 교회에서는 발 밑의 등불 예화를 참 많이 듣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스토아 철학에서 비롯되었던 것일까?)

 

마지막까지 그 결과를 모르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